
함경도 또순이의 과거에서부터 현재의 일기장:
오늘은 2000년
6월 16일: 요지음 남.북
이산가족찾기에 대한 뉴스나 신문을 통해 보면, 어쩐지 내 마음은 한층
들뜨지 않을 수 없다. 나도 통일원에 가족상봉 신청서를 맨 처음
실시 접수할 때 신청했는데, 혹시나 내 고향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까 하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던 순간도 있었으나, 총 신청자 중 선정된 1차 400명 중에는 포함되지 않을 것 같은
이유가 70세 이상의 가족 확인자에 한해 그것도 추첨을 한다니, 이 대상자도
초과하기에 추첨한다는 설명이 아니겠는가 ! 다음 기회를 기대하면서
언젠가 고향을 가보는 날이 있을까 하고, 내 마음은 여전히 부풀기도 해 본다.

1. 내 고향은 함경남도:
나의
과거 어린 시절을 더듬어 보면, 어렴풋이 생각난다. 내 고향 내가
살던 집은 할아버지 대대로 내려온 유산의 자연 속에서 순수하게 성장하던
그 때가 그립다. 뒷산과 과수원이 있는 우리 땅 주위에 둘러싸인
"ㄷ"자형의 기와집은 평화로워 보이기만 한 우리집이 기억
나고 그립기만 하다. 나는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제법 성장한
연령에도 부모나 오빠들과 항상 같이 잤던 생각 난다. 나는 지금도
이 성장기를 생각하면 그 때가 그립다. 따라서 또 한가지 기억
나는 것은 어릴 때의 시험체제가 전 과목 각각 다양한 문제를 출제한
후 표로 추첨하여 해당되는 문제를 답해야 하는 시험제도로, 나는 합격하기
위해 우리 뒷동산 소나무 숲속에서 외우고 또 외워서 시험 치루던 때가
생생하다. 시험은 무사히 끝마쳤으나, 긴장이 풀린 김에 고기를
먹고 체한 나는 병이 났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먼 친척이라고나
할까 하는 다소 교통상 거리가 있는 곳에 유명하다는 의사를 찾아 방을
빌려 치료하기 위해 잠시 머물렀다. 이 때가 약 1949년경이라고나
할 까. 여기에 머물고 있을 때 작은 오빠도 나를 보러 오신 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잠시 집에 갔다 오신다고 하시면서 가시고,
그 무렵(전쟁 당시) 밤에 잠을 자다가 어른들의 말씀이 국군이 후퇴한다면서
피난을 가야 한다는 말씀에 나는 잠결에 깨어나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어른들을 따라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향하던 중 기차는 우리집 앞을
지나는 게 아니겠는가 ! 따라서 기차는 남쪽으로 향해 달리고
있는 사이 우리집 앞을 달리는 기차 지붕에 탄 나는 우리집을 쳐다보니,
아버지께서 부엌문을 잡으시고 안쪽을 쳐다보시는 모습을 목격하였으나,
기차는 계속 달리고 있어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것이 나의
가족과 내가 살던 집을 떠나 헤어지는 마지막이 되어 어언 50년(2000년)이란
세월이 흐를 줄이야 어느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 잠시 피난
갔다가 오는 줄만 알았던 열 몇 살의 소녀는, 어른들을 따라 한없이
무작정 남쪽으로 향했던 것 같다. 어디서인가 기차에서 하차하여
낮이면 산속이나 폐허(모두 피난을 간 빈집)가 된 빈집에 숨어
지내다가도 밤이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나는 눈이 얼어붙은 달밤에
굶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많은 사람들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눈이 가득 쌓인 산길에 얼어붙은 길 위를
걷는 사람들이 마치 운동장에서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처럼 앞.뒤가
사람으로 가득하여 내가 걷고 있는 좌.우가 걷는 사람들로 인파를 이루었다.
어느 주부가 애기를 업고 걷다가 굼주림에 얼마나 걷기가 힘이
들었으면, 눈 위에 버리고 간 애기를 뒤 따라 걷던 남자가 눈 위에서
애기를 주어 안고 뒤 따라가다가 애기 어머니에게 건네 주는 것을 보았다.
이 애기 어머니는 한참 업고 가다가 체력이 딸려서, 또 다시 애기를
버리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이 때는 누구나 너무 굶어서 자신의 몸도
이겨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나는 가끔 그 때를 연상하게 되면,
그 때 그 애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나는 때가 있다. 나는
그 때 어려서 그곳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곳을 달밤에 다른 사람들과
같이 걷노라면, 바다에서 함포사격을 하게 되면 불덩이가 걷고 있는
우리들의 머리 위를 지나 산에 가서 떨어지는 상황은 비일비재하게 수시로
밤이면 반복되었으나, 어른들은 살아야 한다면서 달밤이면 계속 어디론가
걸어가기만 하여, 나도 뒤 따라 무작정 걷다가도 날이 새면 또 앞에
먼저 간 사람들이 머물렀던 빈집에서 무쇠 솥에 돼지를 잡아 먹다 남기고
간 것을 먹고 끼니를 때우고, 또 날이 새면 어디론가 떠났다. 이러한
피난길에서의 생활은 하루 세 끼 식사를 해야 한다는 것은 잊은
뜻한 생활이 계속되었고, 목숨만 부지한다면 하는 생각에 누구나
배고프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하여 도착된 곳이 함흥시 흥남 부두였다. 이 부두에는 피난가려는 인파의
보따리 사이에 나는 끼어서 제대로 먹지 못해 빠져 나올 수 있는 기력이
없어, 하마터면 그 때 나는 이미 저 세상 갔을지도 모르는 내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며칠을 이 부두 바닥에 머물고 있다가 엘에스티(LST:
해군 수송 군함이라는 것을 2001년 6월 25일자로, 과거 전쟁 당시를
방영하는 과정에서 알 게 되었음)란
대형 배로 피난민을 태워 피난을 간다는 것이었다. 그
엘에스티란 대형 배의 옥상은 마치 운동장 같이 넓었고, 우리들은 지하에
가족단위로 보따리를 둘레에 경계선을 만들고 잠시나마 이 보따리 둘레
선 안은 우리집인 셈이었다. 며칠을 지내는 동안 답답하여 옥상에 올라
갈려면, 아찔하게 처다 보이는 사다리를 타고 옥상에 올라가 볼 수 있었다.
따라서 1950년 12월경 마산에 도착하였으나, 마산측에서 받아주지
않아 하루 밤을 지내고, 이 배가 거제도로 갔다고 하는데, 이 사실은
1999년도 TV를 통하여 전쟁에 관한 과거사를 방영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나는 어른들이 모두 내려야 한다기에 나가보니 거제도
장승포 부두에서 보이는 높은 산에 있는 밭에는 보리가 파랗게 돋아
오른 것을 보았다. 구호미인 알랑미 쌀에 보리쌀을 섞은 밥에
반찬은 멸치젓이나 콩잎을 멸치젓에 저린 밑 반찬은 이 지역 주식 반찬이었다.
이 거제도는 근래에 와서 조선소니 대형 기업들이 진출하면서
거대하게 발전되었으나, 그 때만 해도 4방 40리라든가 하는 산이 아니면
바다만 보이는 곳으로 기억된다. 매일 아침이면 원주민과 실향민들은
아침에 세수를 할 때 개울에서 하고, 치약 대신 개울 모래를 이용하여
손가락으로 치아를 닦던 생각이 지금도 옛날 얘기처럼 기억 난다.
그럭저럭 몇 년을 살았을까 ! 어른들이 부산 영도로
이사를 하였다. 어느날 나는 영도 자갈치 시장에 무언가를 구입하러
갔다. 돌아오는 길에 어느 상회간판이 붙은 안쪽에 누군가 앉아
계시는 남자를 보면서, 나는 그대로 지나쳐서 영도다리 지나는 동안
꼼꼼히 생각해 보니, 그 상회 안에 앉아 있던 그 사람은 낯선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 한참 망설이다가 생각 끝에 용기를 내어 그 상회
앞을 몇 번이고 반복해 왔다 갔다 배회하면서 얼굴을 확인하였으나,
서로가 피난길에 지친 탓인지 알아보기 힘들어 그냥 집으로 오기는 그
때를 놓치면 후회가 될 것 같은 느낌이 여서, 한참 망설이다가 용기를
가다듬고, 어두운 내부에 앉아 있는 그 남자 분에게 말을 건넸다. 저기
한가지 말씀을 물어 보겠습니다..... 해도 그 남자는 나를 알아
보지 못했다. 하기야 어릴 때의 소녀가 피난 당시라고 해도 나는
19세정도의 처녀였으니, 알아볼 수 있었겠는가..... ! 따라서
나는 숨을 몰아 쉬면서 혹시 아무개 선생님이 아니십니까 하고 물은
즉 그렇다고 말씀하시면서, 나의 오빠가 어디에 살고 계시다고 주소를
가르쳐 주셨다. 그 분은 바로 나의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이었는데
무척 갑부 집 아들이었다. 즉시 나는 영도다리 건너 집에 돌아와서
어른들께 말씀드리고, 오빠를 찾아 가게 되었다. 나는 오빠가
나가시는 직장의 어느 유지를 만나게 되었고, 그 분이 운영하시는 고아원에
놀러 갔다가, 전쟁고아들 모습이 치근하기만 보여, 스스로 머리를 깎아
주기도 하였는데, 어느날 그 분이 오빠와 함께 자리를 같이 하게 되어,
그 분은 나에게 제시하였다. 글씨를 한 번 써 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한문, 한글, 수치 등을 생각 나는대로 써 내려갔다. 나름대로
인정되어 나는 5급공무원으로 채용되어 5년간을 근무한 경력이 있기도
했다. 이렇게 한문이랑 쓸 수 있었던 것은 지금 생각하면, 과거
우리가 어릴 때에는 지금과 같은 다양한 놀이문화가 거의 전무하여,
자연을 이용한 놀이였는데, 그것도 형제가 모두 학교로 등교하고 나면
취학전인 나는 놀이 상대가 없었다. 따라서 나의 놀이는 오빠
또는 언니가 한문 또는 붓글씨 공부하다 그대로 널어놓고 등교한 그
자체가 나의 놀이었다. 예를 들면 자그마한 얕은 나무 판에 모래를
담고, 그 위에 한문을 쓰고, 지우고 반복하는게 나의 놀이었고, A4 크기의
하늘색 종이에, 붓에 물을 무쳐서 쓰고 난 후, 다음 장에 쓰는 동안이면
앞장은 마른다. 지금 기억으로는 국산은 아닌 것 같은데, 이것이야 말로
종이 낭비가 없는 공부방법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한 집안의 생활환경이라고
생각되는게, 할아버지께서 과거에 급제하여 허참봉 이라는 타이틀(족보에
있음)을 받으셨다는 것을 훗날 오빠로부터 들었는데, 그래서 였는지
여러 개의 장롱 속에는 붓글씨 책들이 가득차 있었는데, 지금 같으면
이것들이 골동품이기도 했을 것 같은데, 그때에는 내가 울면 어머니께서
엿장수에게 종이가 귀한 때라 이 붓글씨 책을 건네 주고 엿을 받아 나에게
주셨던 생각나고, 또한 나는 심심하면 이 붓글씨 책들을 여러 개(할머니,
어머니, 등 시집 오실 때의 장롱: 항상 3대 정도 이상이 같이 살았던
것 같음)의 장롱 속에서 꺼내어 번져가면서 놀았던 게 자연히 정서적으로도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준게 아닌가 싶다(취학 전에 천자문을
암기로 모두 읽었으나, 지금은 두어줄 빢에는 암기로 못읽어 천자 책을
며칠 전에 구입했으나 아직 읽지 못하고 있다). 나는 가끔 생각나는데,
지금도 고향 가족들은 이 책들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을까 ! 하는 궁금한
이유가 지금도 가족들은 그대로 고향 집에 살고 있다니 말이다.
북에서 순수한 어린 소녀가 공부만 하다가 전쟁 폭격 중에,
어른들이 피난해야 한다고 떠나기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피난길에
이렇게 살아가는 동안 공부하는게 자나 깨나 머리에서 살아지는 날이
없었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여념 속에서 그 시절 김동훈 한글
타이프, YMCA 영어강좌, 고등학교 미용과에, 양재학원에, 등 나름대로
배움의 길을 잃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60년대
중반에 나는 패션계통으로 가르치다가 한.일 교류 패션쇼(국제복장학원
주최와 일본 문화복장학원 주최 교류)로 일본 문화복장학원에서 한국에
왔을 때, 나의 유학 이력서(우리나라에서 가르치기로 한 조건이 기회가
있으면 유학을 추천하기로 약속되었음)가 건네진 동기가 되어 서류신청하였으나,
전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연초 초도순시에 5개년 경제개발에 대한 외화획득을
강조, 여자는 외화낭비(이유: 전자들이 유학하여 제대로 결실을 거두지
못한데)가 되므로 안된다는 이유로 나에게도 그 영향이 미쳐, 나는 낮이면
가르치느라 신경쓸 여유도 없었으나, 밤이면 잠을 제대로 청할 수 없어,
서류를 들고 밤거리를 헤매며 눈물로 지새우던 어느날 나는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장학생으로 추천되었는데, 이것은 외화획득이 아니겠는가
싶은 생각이 들어서 혼자 생각해 낸게, 전화번호부에서 해당부서를 찾아
과감하게 외무부 고위 층 자택을 안면 없으면서도 무작정 찾아갔다.
지금 같으면 생각조차 못할 행동을 그 때는 너무 모르고
순진한 혼자 생각에, 자식을 기르는 사람이라면 이 진실을 알아 주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에서 그 부인을 찾아 갔다. 초면인 사람을 찾아 뵙는데
빈손으로 가기가 미안스러워 생각 끝에 동대문 광장시장에서 수수한
한복 한 벌 마련하여 들고 갔으나, 부인은 선물을 받으면 남편에게 누를
끼쳐 안된다고 가져가주는게 자기를 돕는 것이라고 하여 나는 그대로
들고 왔다. 그 부인 자택은 지금 생각하면 강북의 동대문구 소재에
자그마한 한옥에 자그마한 응접실로 기억 난다. 따라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니, 당연히 그 부인인들 무슨 답변을 할 수 있겠는가 ! 하나
나의 애절한 진실에 대하여 결정권은 내릴 수는 없겠으나 동감이 갔던
모양 ....... 그저 듣기만 하던 부인이 그저 돌려보내기 안되어서 였는지,
설명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우리 같이 한번 생각해 보자며 나를 달래는
기분으로 돌려보냈다. 나는 결론 없는 답변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깨에 힘이 빠진 채로 발길을 집으로 재촉하였다. 내
머리에서 지워질 뜻한 무렵, 기대도 하지 않았던 어느날, 외무부 직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게 아니겠는가...... 나는 흥분되어 두근대는 가슴을
달래며, 내용을 들은 결과 일본에 조회 해 본 결과 장학생으로 초청되어
유학을 시켜서 공부시켜 주겠다고 확인된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이름 끝 자가 달라 다시 조회할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다시 조회한 결과 이름이 맞다고 유학하게 되어, 나는 아무 것도
없이 선물만 몇 개 달랑 들고, 일본 하네다 공항에 도착, 일본 문화복장학원에
도착하여, 우선 이사장, 학원장, 유학생 담임 선생님들과 한자리에 앉게
되었다. 장학생 조건으로 나에게는 모든 게 허가되어야
하는 입장이라 대화를 나눴는데, 혼자 독학을 한 일어 실력은 당장 능숙하지는
않았으나, 상대방이 말을 하면, 내용은 모두 알아들은 이유가 단어는
많이 암기되어 있는 상태라 처음 나의 일어는 단어 사이에 들어가는
용어, 예를 들어 ....에서, ....는데, 등등이 얼른 생각나지
않아, 높으신 분들이 말씀하사면, 나는 의미는 모두 알아듣고, 백지에
답을 쓰는 방법으로 대화를 나눈 결과 모두 알아 들으니, 공부하는데는
지장없으리라는 판단에 직접 그 자리에서 노트에서부터 연필, 교재 셋트
등 모두 제공해 주면서 유학생 기숙사, 식사비 모든 것 무료제공 받는
조건으로 공부할 수 있는 행운아가 되었다. 따라서 재단과라는
공부할 과까지 지정된 이유는, 설명인즉 일본 측이 데려다 가르쳐서
다시 고국에 가서 가르치려면, 기초에서부터 문화복장식을 잘 알아야
하는게 아니겠냐는 설명을 나에게 첫날 해 주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무엇이든 주어진 것이라면 최선을 다하겠다는 생각에 굼주렸던 공부에
너무 좋아 밤을 지새워도 너무나 행복하고 즐거운 공부에 ..... 이런
행운아도 또 어디 있을까 하고 피곤한 줄도 몰랐다. 또한 나는
1년 남짓했을까 할 무렵 YPO(일본 전체 국내 젊은 층 갑부라나, 이사장님도
여기에 포함된 한 사람임)란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다. 재단과
1년 졸업하고 나는 디자인과 지망했으나 학교 당국이 합격하면, 계속
장학생으로 공부시키고 떨어지면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조건이었다. 나의
머리에만 승부를 걸 뿐 무슨 할말이 있겠는가 ! 하는 데까지 죽기 살기로
최선을 다하는 것밖에 생각나는 것도 없었다. 디자인과는 정원
80명(프랑스에서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겐조 씨도 디자인과
출신임, 나보다 몇 년 전 졸업생이라나)인데, 응시자는 전국에서 90점
이상의 우수한 자들이 추천서로 입시를 치르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때 기억으로는 일본 전국적으로 엄청난 인원수가 몰려와 하루종일 시험
치룬 결과, 나의 수험번호는 100번, 잊혀지지도 않는다. 나는
혹시 떨어지면 한국에 돌아갈 생각으로 가전제품사에 가서 전기 밥솥(그
때 우리나라에 전기 밥솥 귀한걸로 알고 있음)이나 한 개 구입하려고
갔으나, National(松下: 마쯔시다) 대리점 직원의 말이 일본 100V.가
한국 110V.에 사용하면 수명이 단축되어 메이커 이미지가 손상되므로,
긴자(銀座)에 있는 외국용 대리점에 가서 구입하라는 것이어서, 알려주는
주소를 들고 찾아가 구입하였고, 이 전기 밥솥은 지금도 새 것으로 있어서,
이사 다닐 때면 한번씩 만져보고 그 때를 생각한다. 일본사람들의
제품에 대한 기업정신에 또 한번 놀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초조하게 시험결과만 기다리던 어느날 합격통지를 받고, 나는 너무
좋아 기절할 것 같이 펄쩍펄쩍 뛰었다. 하기사 외국인은
처음으로 디자인과에 합격했다는 뒷 얘기였다. 따라서 나는 계속해서
모든 비용, 즉 등록금에서부터 기숙사 및 식비 등 면제 받고 공부를
계속할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모든 유학생들이 실습 숙제가
매일 있어서, 기숙사에서의 저녁에서부터 밤 11시(11:00 PM에는 기숙사
전기만 자동으로 꺼짐)사이에 모르는 부분들을 가르쳐 달라고, 숙제를
담은 통으로 내 방 문 앞에 줄을 세웠다. 나도 내 숙제를 하면서
쾌히 도와 줬는데, 이렇게 자그마한 봉사가, 각국 전체 유학생 회장
선출에서, 각 나라 대표 한 사람씩 출마했는데, 투표 결과 다른 나라
많은 유학생들이 나에게 표를 주어 나는 총 유학생 회장까지 맡아 보게
되어 결국 또 봉사했는데, 남을 봉사하여 돕는다는 것은 어떤 이익보다는
돕는다는 그 자체에 흐뭇함과 보람을 느끼게 하여 보다 행복한 생활인
것 같았다. 이렇게 공부하다보니 학위 생각이
나는게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다시 학부를 지망했으나 많은
교수들이 말렸다. 그 가진 재주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있는데 하고 말이다. 나의 대답은 돈보다 명예를 원한다고 고집하여,
대학에 응시하기로 결심, 시험을 본 결과 합격하여 대학 옆에 방을 얻어
기숙사를 나와 학문의 깊이에 몰두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동안
재단과, 디자인과에서 입체재단, 패션 일러스트레이션, 핀웍 등을 하면서,
이외에도 모자과, 편물과 금공과 등의 수료증도 받고, 기술상(의상),
각 나라 대항 디자인상(의상), 양재교원 자격증(시험 응시 결과), 등을
받고, 1969년경 일본에 유학 중 운전면허를 취득했는데, 과히 쉽지 않은
그 이유가 법령, 구조, 실습이, 각 10단계까지 있다면, 어느 한 가지도
먼저 진행되는대로 할 수 없이, 평행으로 수치 단계가 같아야 하기에
세 가지 중 한 가지가 안되면, 이 한가지가 될 때까지 아무 것도 못하게
되어 있어서, 나의 유학 형편에 경제적인 면과 무의미한 시간낭비는
결코 용납되지 않아 죽기 아니면 살기로 매일 새벽 4시면 일어나 모두들
자고 있는 사이 사감선생님을 깨워 운전연습장으로 가서 방학동안에
운전 연습 모두 마치고, 9월학기가 시작하고 주말을 이용하여, 정부가
운영하는 공안위원회에 가서 최종 실기와 필기시험을 보아 합격하였는데,
공부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같은 생각에 이세상에서 운전면허만 취득한다면
이 이상 더 어려울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결코 운전면허 취득하고
나니, 일본에 있는 다른 한국사람들은 그 어려운 것 어떻게 취득할 수
있냐고, 거짓말이라고, 운전면허증 보자는 사람도 있었다. 얼마나
쉽지 않았으면 믿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짐작 갈만도 했다.
학부를 졸업하고 보니 또 다시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은
생각이 문득...... 다시 대학원에 응시한 결과 합격하여 석사학위를
마치고 나니, 박사학위가 간절하여, 오쟈노미즈여자대학에서 복식미학연구
2년동안 하면서, 나는 생각하기를 일본에서 이만큼 국민성에 의한 섬세함을
터득하였다면 나름대로 큰 의미도 있겠으나, 이러한 점을 겸비했다고
나 혼자만이라도 자청한다면, 좀 더 넓은 곳에서 무엇인가를 넓혀서
펼쳐 보이고 싶은 생각에 박사학위과정을 미국으로 결정하고, Toefl(외국인에
한해 영어 능력 테스트)과 GRE(대학원 응시자 전원에 필수적인 시험)를
준비하면서 미국 전국에 나의 전공을 찾아 150여개 대학을 찾아 편지를
보낸 결과 110여개 대학에서 편지가 왔다. 대학에서 집에 돌아오면,
마치 나는 몰려드는 편지의 답장 쓰기에 취업이나 한 것과 같이 바쁜
나날이었다. 이와 같은 결과로 세 개의 대학에 합격하여
I-20 Form이 왔다. 이 중 검토하여 나의 전공에서 제일 좋다는
대학으로 짐을 싸서 떠났다. 미국 대학교에서 1년 후부터 가르치는
기회가 주어지게 되면서, Out of State(유학생 자격)가 In State(국내
학생들과 같은 자격)로 되어, 미국학생들이 내는 등록금으로 바뀌어,
그저다시피 공부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받은 월급으로 세금도 내야하니
Social Cecurity(주민등록증과 비슷한 것)도 발급 받아 은행의 Master
Card도 받을 수 있는 신분이 되었다는데 자부심이 뿌듯하기도 했다.
따라서 박사과정을 하는 동안 미국 전체 대학을 대상으로 한 박사과정
부문에서 가정대학상(Omicron Nu)을 받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박사학위 마치기까지 4년, 추가로 가르치기까지 총 6년동안 연구하고
있던 중 한국 교육부(일본 대사관 교육부 관계로 계시던 분)의 관계자로부터
편지가 왔다. 외국에서만 돕지 말고 한국발전을 위해 귀국하여
교육에 이바지하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대학으로부터 잠시 허가를
맡아 임시 귀국하여 소개한 7개 대학의 총학장님들과 면접하고 4개의
대학에서 가르치기로 결정하고, 다시 미국으로 가서 학위수여식을 마치고,
전체 미국교수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탐방차로 유럽 12개 국을 돌아
1984년 8월에 귀국을 하였는데, 한국을 떠나 유학 길에 오른지 17년만에
고국에 완전 귀국하여, 그 당시 세 개의 대학을 번갈아 가며 매일 가르치던
중 신문에 교수초빙이라는 공채가 있어서, 서류를 제출하고 면접시험을
치른 결과 교수로 채용되어 1985년 3월 1일부터 교수직에 몸을 담게
되었고, 2000년 3월 1일부터는 계속해서 현재 대학원만 가르치고 있는
중이다. 나는 한국보다 외국에서 여러 가지의 상장을 받은게 많은데,
이번에 2000년 2월 29일 부로 교육부 장관으로부터 교육공로상을 받게
되어 무엇보다 그동안 교육에 이바지한게 잘했구나 하는 흐뭇한 생각이
든다. 나는 대학에서 가르치는 동안 중국에 국제학술세미나가
있어서 갔다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도문(지역명)을 가게 되었다. 두만강
둑에 가서 보니, 강 건너 보이는 곳이 바로 함경북도가 아니겠는가 !
내 고향은 함경남도, 마치 내가 살던 고향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이 때의 기분이 묘하게 찹찹했다. 사람은 왜 새 처럼
겨드랑에 날개가 없을까 하고 말이다. 있었더라면 필요시 저기
보이는 곳에 좀 날아가 공중에서라도 내가 살던 고향 집이라도 보고
올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한국에 돌아와서 생활하던 중
어느날 신문에서 보았다. 통일원에서 허가를 받아 비공식으로
서신 접촉이 가능하다는 것을 ....... 당장 나는 통일원을 찾아 필요한
서류서식에 접수시켜 얼마 후 허가 통지서를 받았다.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 족 가운데, 내 고향 이웃에 살던 사람을 알아 물어 보니 소식이
왔다는 것이었다. 내 고향 내 집 주소에 가족들이 현재 그대로
살고 있다는 소식과 나에 대해서는 전쟁에 사망했다고....., 이렇게
원고를 쓰면서 살아 있는 나를 전쟁에 죽은 줄로만 알고 있는 우리가족들과의
맛남이, 50년이 지나도록 맛날 수 없는 현실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또한
중국을 통하여 내가 살고 있던 집에서 편지가 왔다(통일원에 보고 되어
있음). 따라서 남.북 간에 편지가 마음대로 왕래되지 않는 현실에서,
더 이상 상봉하기 전에는 서로 별 다른 소식 없는 상태이다. 오늘은
2000년 8월 15일 남.북한 실향민 각각 100명씩 추첨되어 상봉하는 날이라,
설레고 분주한 날이다. 요사이 이렇게 이산가족 찾기가 활발하여
나도 가족과 상봉하는 날을 기대하면서, 현재가 2000년 8월 인데, 지금
나의 심정은 50년전(1950년) 어릴 때, 내가 살던 나의 집에 가보고 싶은
심정을 어느 누가 알아주랴 ....... !
나는
요새 시간이 나면 서예에 취미가 있어서 하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을
화선지에 붓으로 써 본다.
天 涯 各 南 北 見 月 幾 想 思
(하늘
끝까지 남.북으로 서로 나뉘어, 달 바라 보며 몇번 천
애 각 남 북 견 월 기 상 사 이나
그리웠든가 ! 一
去 無 消 息 死 生 長 別 離 한 번 가더니 소식조차 없으니 죽거나 살거나
기나 긴 일 거 무 소 식 사 생
장 이 별 이별이련가.....!)
어쩐지
나를 두고 하는 말과 같아서 서예로 한 번 내려 써 보았다. 서예와
사군자는 해 보니, 정서적으로도 좋은 것 같아서, 앞으로 시간이 주어진다면
계속할 예정이다. 알아서
손해 없는 상식 한마디:
옛부터 사람 나이를 가르켜 온 용어는:
지우학-15세,
지천명-50세, 고희-70세, 희수-77세.

2. 이산 가족 상봉 현황:
제1차
이산가족상봉: 2000년 7월 17일 북한으로부터의 200명에 대한 이산가족찾기
명단을 발표하고, 하루가 지난 오늘 100여명의 이산가족찾기에 확인된 상태,
8월 15일(화)~2000년 8월 17(목)(2박 3일), 남.북 각각 100명씩 1차적으로 상봉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된다는
소식에 전국적으로 확인된 가족을 소개하였는데, 우리가족은 아닐지라도
내 자신도 확인과정을 소개하는 장면을 보노라면, 흥분하고 때로는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흐뭇한 마음 감출 길 없는데, 확인된 가족은
얼마나 꿈만 같은 일일까 ! 참 이제라도 이러한 기회가 주어진데
대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1세대 중에는 저 세상 가신 분들이 적지
않아 아쉬운 한편 확인된 세대는 전쟁이후 50년이나 된 오늘날 대부분
70여세 전.후인 것을 가만했을 때, 너무 늦은 감에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을 보면, 그나마 이렇게 이루어진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좀 더
일찍 이루어 졌드라면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이래서 인간생활에서
누구나가 100% 만족이 없다고 하는 말이 있는게 아닌가 싶다. 제2차
이산가족상봉: 2000년
11월 30일(목)~2000년 12월 2일(토)(2박 3일), 2차 이산가족 상봉을 남.북이 각각 100명씩 이루어졌다. 뉴스에
의하면, 1차 때, 정부의 경비가 18억(이럭저럭 약 19억 정도라나).....
따라서 2차 상봉에서는 경비절약 차원에서 9억 예산으로, 이에 맞춰서
저렴하게 제공해 줄 호텔을 선정하여 결정했다고 한다. 상봉 장소: 남측(롯데월드호텔), 북측(고려호텔)에서
이루어졌다. 이렇게
100명씩 상봉하려면, 천년은 걸여야 실향민이 모두 만날 수 있다는데,
무엇보다 통일이 되는 때가 가장 빠른 만남이 되는게 아닌가 싶다.
제3차 이산가족상봉: 2001년 2월 26일(월)~2월 28일(수)(2박 3일), 3차 이산가족
상봉을 남.북이 각각 100명씩, 상봉 장소: 남측(롯데월드호텔), 북측(고려호텔)에서
이루어졌다. 제4차
이산가족상봉을 북측이 일방적 보류: 2001년 10월 16일(화)~10월 18일(목)(2박
3일), 4차 이산가족 상봉을 남.북이 각각 100명씩, 상봉한다고 했는데,
남측은 이번에 고령자 위주로 80대 이상 122명, 70대 124명, 60대
57명으로 총 300명을 북측에 제공, 생존자 확인을 의뢰하여,
확인자 중 100명을 선정하게 되는데, 어느 70대의 할아버지가 이
선정과정 명단에 오르지 못한 이유로, 북측에 가까운 강물에서 자살을
기도, 목숨을 잃은 안타까운 사건도 일어났다. 10월 12일
북측으로부터 4차 상봉을 일방적으로 보류통지가 왔다. 제4차
이산가족상봉 재개: 2002년
4월 28일(일)~2002년 4월 30일(화), 위에 4차 이산가족 상봉의 북측 보류가, 4월 28일(일)부터 다시
재개되어, 남.북이 이번에는 금강산에서 상봉하기로 결정되었는데,
남측의 어느 할아버지는 폐 질환으로 불참하여, 99명이 상봉하게
되었다. 제5차
이산가족상봉: 2002년
9월 13일(금)부터 5차 이산가족 상봉으로, 남.북이 다시 금강산에서 상봉하기로 결정되어,
1차 팀: 9월 13일(금)~9월 15일(일)(2박
3일),
남.북이 각각 100명씩(북측: 100명, 남측: 100명과 그 친지 포함하여
455명 참가), 2차 팀: 9월 16일(월)~9월 18일(수)(2박
3일),
남.북이 각각 100명씩(남측: 99명, 북측: 100명과 그 친지 포함하여
299명 참가), 상봉하게
되었는데, 특히 이번 만남은 7~80대의 노 부부나, 노 형제의 만남이
두드러졌다. 남.북측의 수명 연령에 대한 비교를 해 보면(2001.
11. 7. 소식통), 남측 사람이 북측 사람보다 약 10년 정도
수명이 길고, 어린아이의 사망율에 있어서, 남측은 선진국
수준인데 비해 북측은 선진국 수준에서 약 11배의 사망율을 나타내고
있는 현실이라고 한다. 이 현실은 무척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제6차
이산가족상봉: 2003년
2월 20일(목)~2003년 2월 25일(화)(남.북 3일간씩: 총 6일간)로, 제1진은
2박 3일간(2월 20일~2월 22일) 북측 상봉단 99명과 남측 가족 461명(친지
포함)이 동해선 임시도로(처음으로 육로)를 통해 금강산 온정각
휴게소에서 상봉하는데, 이번 남측 가족의 최고령자는
97세 장수천 할머니의 북측 딸인 70세 양영애 딸 할머니와의 상봉이고,
제2진은 2월 23일~2월 25일(2박 3일간) 남측 상봉단 99명과 북측 가족이
금강산여관에서 상봉이다. 제7차
이산가족상봉: 2003년
6월 27일(금)~2003년 7월 2일(수) 사이에 제1진은 6월 27일~6월
29일(2박 3일간) 남측 상봉단 100명과 북측 가족 250여명이 금강산에서 상봉하고,
제2진은 6월 30일~7월 2일(2박 3일간) 북측 상봉단 100명과 남측 가족
475명의 상봉이다. 따라서 남측의 102세 어머니와 북측 딸의 만남과 36년만의
납북어부 아들과 남측 어머니의 애절한 만남도 있었다. 제8차
이산가족상봉: 2003년
9월 18일(목)~2003년 9월 22일(월) 사이에 제1진과 제2진이 각각
2박 3일간씩 금강산에서 상봉하였다. 제9차
이산가족상봉부터는 아래 도표 현황에 제시했다. 제1차
이산가족화상상봉: 2005년
8월 15일(월): 광복 60주년을 기념하여, 화상설치(남측: 11개 지역,
북측: 평양 고려호텔)하고, 총: 40명(남측 상봉자 20명에 동반가족
57명이 북측가족 50명과 화상상봉하고, 북측 상봉자 20명이 남측가족
79명과 화상상봉하였다.
이산가족상봉 현황 도표: (제7차부터
양측 동반가족 참여)(북측 총 인구: 2001년도 기준: 2,314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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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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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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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봉인원(남.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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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봉
장소(1진:남측,
2진:북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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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이산가족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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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8.15(화)~8.17(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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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100명씩(2박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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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측(서울시내호텔),북측(고려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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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이산가족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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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11.30(목)~12.2(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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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100명씩(2박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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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측(롯데월드호텔),북측(고려호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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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이산가족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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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2.26(월)~2.28(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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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
100명씩(2박 3일)
|
남측(롯데월드호텔),북측(고려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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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이산가족상봉
|
2002.4.28(일)~4.30(화)
|
각각
100명씩(2박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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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온정각 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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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차
이산가족상봉
|
2002.9.13(금)~9.18(수)
|
각각
100명씩(2박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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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여관(1진 100명, 2진 10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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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차
이산가족상봉
|
2003.2.20(목)~2.25(화)
|
각각
100명씩(2박 3일)
|
금강산
여관(1진 100명, 2진 100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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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차
이산가족상봉
|
2003.6.27(금)~7.2(수)
|
각각
100명씩(2박 3일)
|
금강산
여관(1진 100명, 2진 100명)
|
|
제8차
이산가족상봉
|
2003.9.18(목)~9.22(월)
|
각각
100명씩(2박 3일)
|
금강산
여관(1진 100명, 2진 1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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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차
이산가족상봉
|
2004.3.29(월)~4.3(토)
|
각각
100명씩(2박 3일)
|
금강산
여관(1진 100명, 2진 100명)
|
|
제10차
이산가족상봉
|
2004.7.11(일)~7.13(화)
|
각각
100명씩(2박 3일)
|
금강산
여관(1진 100명, 2진 100명)
|
|
제11차
이산가족상봉
|
2005.8.26(금)~8.31(일)
|
각각
100명씩(2박 3일)
|
금강산
호텔(1진 98명, 2진 100명)
|
|
제12차
이산가족상봉
|
2005.11.5(토)~11.10(목)
|
각각
100명씩(2박 3일)
|
금강산
호텔(1진 100명, 2진 100명)
|
|
제13차
이산가족상봉
|
2006.3.20(월)~3.25(토)
|
각
100여명씩(2박 3일)
|
금강산호텔(1진 140여명,2진 100명)
|
|
제14차
이산가족상봉
|
2006.6.19(월)~6.24(토)
|
각
100명씩(2박 3일)
|
금강산호텔(1진 100명,
2진 100명)
|
|
2006.6.25(일)~6.30(금)
|
각
100명씩(2박 3일)
|
금강산호텔(3진 100명,
4진 100명)
|
|
제15차
이산가족상봉
|
2007.5.9(수)~5.14(월)
|
각
100명씩(2박 3일)
|
금강산호텔(1진 100명,
2진 1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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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차
이산가족상봉
|
2007.10.17(수)~10.22(일)
|
북:97명/남:93명(2박3일)
|
"
"(1진:북측 97명, 2진:남측 93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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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차
이산가족상봉
|
2009.9.26(토)~10.1(목)
|
각 100명씩(2박 3일)
|
" "(1진: 남측:97명, 2진: 북측:9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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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8월 31 현재:
총; 10,000여명의 상봉이 이루어졌다고 방송했음.
3. 제3차 세계 신종 얼굴없는 테러와 보복전쟁:
가.
몸과 첨단기기와의 싸움: 2001년 9월 11일 미국 쌍둥이 빌딩(뉴욕의
세계무역센터)이 테러에 의해 무너지면서, 세계의 경제를 우려했는데, 이전과는
다른 신 무기의 제3차 대전이 일어 난다고들 우려했다. 우리나라도 이로 인해 수출이 위축되어 우려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우리도 비 전투 지원(걸프전과 같은 형태)을 하기로 결정... 테러를 이 세상에서 제거해야 한다는
뜻에서, 아프카니스탄의 빈 라덴을 잡기 위한 목적으로, 2001년 10월 8일 1시에 1차~계속, 드디어 미국(주동)과
영국이 아프카니스탄에 공습을 가했다.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인 아프카니스탄과 세계에서
제일 부자 나라인 미국(첨단장비 1위)과의 전쟁으로, 아프카니스탄은 과거 구 소련과의 23년간 전쟁의 경험으로, 산악지대의 벙커(땅 굴) 은둔하면서 게릴라 작전에 의해 구 소련도 물러 가리만큼이나 맨 손으로 전쟁을
하는 나라....과거에는 나라간에 전쟁이 나면, 싸우나부다 했으나 현실은 국제화 정보화 사회다 보니, 세계적으로 수출.수입에 영향이 미쳐 경제가 위축되어, 소비자의 생활에 영향이 미치는게 문제점이다. 결론은 이 세상에서 얼굴 없는 전쟁인 테러만은 뿌리를
뽑아야 할 것이다.
나.
아프카니스탄 난민 지원: 미국의
쌍둥이 빌딩 테러로, 테러와의 전쟁이란 타이틀로 아프카니스탄의
탈레반 지도자 오마르와 알카에다(테러 조직)오사마 빈 라덴을 응징하기
위해 보복 공격(2001. 10. 8. 부터~)으로, 미국과 아프카니스탄의
전쟁으로 수 많은 난민이 굼주림에 시달리고 있는데, 우리도 과거의
전쟁으로 구호미인 알랑미와 구호 품으로 생활하던 때가 생각난다.
이렇게 밀려드는 난민을 돕기 위해 미국이 구호 품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단다.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다양한 민족이 복합적으로
성립된 나라여서, 내분으로 헐뜻는 것보다 단결심과 돕는 마음씨가
무척 아름답다.
다.
아프카니스탄의 여자에 대한 정책:
아프카니스탄의 면적은 우리나라의 3배 정도인 산악지대이며,
세계에서 제일 가난한 나라로 여자에 대해 취악한 정책이다. 따라서
여자는 교육을 시켜서는 안된다는 정책으로, 교육 금지령을 내려,
남자 아이들만 취악한 교실에서 교육을 받고, 여아들은 불법으로
지하 조그마한 방에서 몇 명씩 글을 깨우친다. 또한 성인여자는
타인에게 얼굴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의미에서, 천으로 머리에서부터
발 끝까지 쓸 수 있게, 여유 있는 자루 형태의 얼굴 부위에 구멍을
내어 그물망으로 제작되었으며, 유니폼과 같은 것을 착용해야 외부를
다닐 수가 있는데, 이것을 이행하지 않았을 때에는 그 자리에서
공개 총살을 한단다. 남.여 평등을 강조하는
현실에서, 이 나라에 태어나지 않은게 다행..이럴 수가 ?
라.
아프카니스탄 공습으로 카블 주민의
환호: 북부동맹이 카블을 점령하면서, 카블 주민들의 환호와 함께 즐거워 하는
모습이 소식통(2001. 11. 16.~19.)에 의해 볼 수 있었는데, 특히 카블 주민인 여성들의 해방감에
대환영을 하는데,
얼굴까지 가리는 부르카(자루 옷)를 벗어 제치고, 화장에 선그라스 쓴 젊은 여성들의 모습과
방송국에 사상 첫 여자 아나운서가 방송하는 모습...수도인 카블TV의 6년만에 재개, 영화관 재 개관 준비로
간판 달기 재 정비 등으로, 바쁜 나날의 현실이라고...그야말로 여성 개혁이 일어난 셈...... 어느 중년 여성은 자녀의 교육에
파키스탄으로 가야할 판이라고....외쳤다.
마.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은 사실상 붕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은 사실상 붕괴(2001.
11. 19. 소식통) 되었다고... 빈 라덴은 칸다하르에서 미국.영국 군에 의해 포위망 좁혔다고(영국 선데이 타임즈)는 하나
라덴을 목격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 전 대통령인 랍바니가 귀환하고,
유엔 특사가 거국정권을 구성하기 위한 타협으로, 아프가니스탄의 수도인 카블에 도착하여 북부동맹 책임자인 외무장관과 협상을 추진 중이라고...
바.
탈레반 군의 자해와 북부동맹군 어느 어머니의 한 풀이: 북부동맹의 탈레반 점령(미.영 공습)으로, 일부 탈레반
군인들은 조건부 탈환을 시도하는가 하면, 일부 군인은 자체 자살기도도 한단다. 따라서 과거 북부동맹이 탈레반 군과의 싸움에서 아들을
셋이나 잃은 어느 어머니는 탈레반에 다시 돌아와 탈레반 군이 죽은 시체를 돌아다니며, 돌을 던지며, 원한과 복수하려는 모습을 보았는데..... 이유인즉: 과거 북부동맹인 아들 셋 모두가 탈레반 군과
싸우다 목숨을 잃고, 어머니마저 쫓겨 났다가, 북부동맹이 탈레반 점령 혜택으로 다시 돌아와 자식들의 원한풀이란다.
전쟁은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나...동기는 미국 쌍둥이 빌딩이 얼굴 없는 테러 전쟁에 많은 피해와 목숨을 잃은 것 때문....세계에 전쟁이 없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면서....
사.
오사마 빈라덴의 소원(긴급): 아프가니스탄 쿤두즈의 탈레반군 투항으로...다급해진 오사마 빈라덴의 말에 의하면, 만약 자신이 체포되었을 경우, 사살해 달라고 측근에 부탁한 것으로 알려졌다(2001. 11. 22. 소식통).
아.
결국 아프가니스탄의 항복: 아프간이스탄의 미국 공습이 있은지, 두 달만에
항복...아프간이스탄의 과도정부에 의하면, 2001. 12. 7. 탈레반 정부가 항복하였다고 하는데... 결국,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에서 테러조직인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을 잡기 위한 목적으로,
영국과 합세하여, 세계 각 나라의 지원을 받아가며, 물론, 우리나라도 지원한 현실에서, 공습을 가한지
불과 두 달만에 초토화의 결실로 탈레반 정부가 사실상 항복하게 되었다. 따라서 탈레반 지도자인
오마르는 모습을 감추고, 빈 라덴도 산악지대 벙커를 파괴하여 색출 중....항복은 하였으나 두 사람을 잡기
위한 공습은 계속 중이라고....

전쟁의
경험을 겪은 나에게는 어쩐지 우려스러운 전쟁이었는데...이나마
큰 불은 끄게 되었다는 안도감에... 북측과도...지속되는 만남이
이루어지기를 고대할 뿐...
출처:
허갑섬 홈페이지 주소(URL): http://www.sungshin.ac.kr/~hu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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