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백두산에서 뻗어나간 산줄기가 백두대간과 산맥을 이루어 국토의 뼈대가 되었고, 산의 기운[氣脈]이 뻗어가 각 군현(郡縣)으로 이어져 우리 생활 터전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와 분단을 지나면서 하나로 이어오던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나뉘었고, 동시에 백두대간의 산맥체계도 단절되었다.
이번 전시는 이 땅에 살았던 선조들이 지도를 통해 우리 땅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이해하고, 그 안에서 산들이 산맥으로 이어져 우리의 삶과 문화 속에 녹아 함께 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곧 한반도는 하나의 유기적 관계로서 그 안에 사는 우리는 역사와 문화를 함께 공유하는 공동체라는 인식이 바로 우리가 전통적으로 갖는 '산'의 의미일 것이다.
조선시대 백두대간(白頭大幹)을 언급한 가장 오래된 실학자의 책은 1614년(광해군 6)에 완성한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로 조선에 있는 모든 산의 근본이 백두산이며, 마천령(摩天嶺)·철령(鐵嶺)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금강산·오대산·태백산이 되고 지리산까지 이어진다고 하였다. 또 남사고(南師古)의 말을 인용하여 이 산줄기가 백두대간(白頭大幹)이며, 바다 속으로 뻗어 제주도와 일본에까지 이어진다고 했다.
이러한 백두대간의 정보는 조선시대에 지속적으로 나타났으며, 1대간(大幹)·1정간(正幹)·13정맥(正脈) 체계로의 완성은 1770년 무렵 쓰여진『산경표(山經表)』에서 비롯되었다. 위의 지도는 박물관소장 <조선전도(朝鮮全圖)> 위에 산경표의 정보를 보여주고 있다.
Territorial Map of the Great East[Korea]
김정호(1804?~1866?)
1861년
종이에 목판 인쇄 후 채색
30.6×20.1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이러한 국토체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산줄기를 가장 눈에 띄도록 봉우리와 능선을 굵은 줄로 그리고, 높은 산은 위로 솟은 톱날 모양으로 표현했으며, 이름난 산은 묘사가 더 세밀하다. 백두산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가장 굵게 나타냈고, 정간과 정맥은 굵기를 달리했다. <대동여지도>는 우리 산의 맥락과 산줄기를 잘 표현한 명실상부한 대표적인 우리나라 고지도이다.
" class="imgFile">조선 후기에 주목할 만한 점은, 명산 지정에 있어 유학자를 중심으로 한 명산과 생활공간의 입지조건 그리고 수양 장소로서의 명산의 가치가 재발견된 점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나라의 큰 명산으로 12개의 산을 지정했으며, 명산의 장소성과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최원석, 「명산지정의 역사적 배경」, 『월간 산』, 2018.
조선 후기에 제작된 고지도는 당시 사람들의 명산에 대한 인식을 이해하는데 좋은 단서가 된다. 고지도에는 풍수지리 관념을 기반으로 한 국토의 중요한 산줄기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백두산으로 중심으로 뻗어가는 산줄기와 그 속의 명산을 상세히 표현하고 있다.
이 전시에는 10개의 산을 ‘명산’으로 선정하여 지도에서 보여주는 산의 표현과 지리적 입지를 함께 소개하고자 한다. 전시를 기획하며 선정한 10곳 외에도 계룡산, 설악산, 팔공산 등 예로부터 명산으로 꼽힌 산이 많지만, 공간의 한계로 제외하게 되었다는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10곳의 명산은 각 산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의미와 가치에 주목하였다. 영토의 종주(宗主), 백두대간의 중심, 유람의 대상, 신과 맟닿는 장소, 국가의 중요한 문서나 대장경 등의 보존이 유리한 장소성, 왕도의 선정과 국가의 번영에 중요한 장소성 등이 명산의 선정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는 이 전시에 제시될 고지도에 많이 기록된 산이기도 하다.
" class="imgFile">Map of the Eight Provinces in Joseon
18세기 중엽
종이에 묵서와 채색
64.5×48
백두산은 한국 고대문명의 중심지인 고조선, 고구려와 발해의 주요 무대였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종산(宗山)으로 지기(地氣)의 원천이며, 그 신령한 힘이 조선의 산천에 가지처럼 연결되어 뻗어간다고 믿었다. 이러한 유기적 국토관인 백두대간의 개념은 삼국시대 이후 풍수사상의 보급과 함께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국과의 경계지역으로 유목민족들이 활동하였던 곳이기도 했고, 특히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백두산을 자신들의 발상지이자 성지로 여겼다. 1712년 청은 조선과의 국경을 정하기 위해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웠으며, 한국전쟁 후에는 중국과 북한이 맺은 조약에 따라 현재까지 두 나라의 국경선이 천지 한가운데를 지나간다.
" class="imgFile">Terrestrial map
1817년
종이에 목판인쇄
30.3×33.7
묘향산(妙香山)은 산이 기묘하고 숲이 향기를 풍긴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불교에서는 역풍·순풍이 불 때 반대 방향에도 냄새를 풍기는 수묘(殊妙)한 향기를 뜻한다. 단군신화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삼국유사』에서 일연(一然)이 ‘태백산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이라고 하면서 우리 민족의 성지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묘향산은 12세기 말 농민반란의 근거지였고, 1216년 거란과의 전투가 있었던 곳이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이 전국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승을 일으킨 승병의 근거지였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全州史庫)에 소장된 조선왕조실록이 1597년 묘향산 보현사 별전으로 이전된 후 1605년부터 1633년까지 사고를 두어 실록을 보관하기도 하였다.
" class="imgFile">Territorial Map of the Great East
김정호(1804?~1866?)
조선, 1861년
종이에 목판 인쇄 후 채색
30.6×79.2
칠보산(七寶山)은 불교의 일곱 가지 보물이 산중에 묻혀 있다고 해서 지어졌다는 설과 먼 옛날 7개의 보물이 많은 산이 솟아오른 후 6개가 잠기고 한 개만 남아 칠보산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해진다. 함경도 지역의 외진 지정학적 위치로 다른 명산에 비해 기록은 적으나, 예로부터 ‘함북의 금강’이라 칭하였으며, 『택리지』에서는 칠보산의 아름다운 형세를 묘사하며 함경도에서는 칠보산만이 명산으로 꼽을만 하다고 평가였다. 칠보산의 특산물은 송이버섯인데,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 북한의 단골 선물이 바로 ‘칠보산 송이’이다.
" class="imgFile">Map of the Eastern Country
1800~1822년
종이에 묵서와 채색
82×58
금강(金剛)이란 말은 불교 경전 『화엄경』에 ‘해동에 보살이 사는 금강산이 있다’고 한 데서 유래했는데, 계절에 따라 개골·풍악·봉래 등의 이름으로 불려왔으며, 흔히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으로 나눈다. 금강산은 삼국시대부터 신라 화랑들이 유람하는 성산으로 숭배되었으며, ‘고려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 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라는 중국의 시인의 말이 전해질 정도로 고려시대부터는 타국에서도 명산으로 인정받았고, 조선 태종대에는 중국 사신이 금강산을 다녀간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많은 사대부들이 금강산 유람을 소망하며, 금강산은 사대부들의 대표적인 유람지였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30일 이상 소요되는 대장정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 지금도 많은 유산기(遊山記)와 정선, 김홍도 등이 그린 진경산수화가 남아있다.
" class="imgFile">Map of Gangneung District, Gangwon-do Province
1872년
종이에 묵서와 채색
83×138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오대산(五臺山)의 명칭은 꽃 모양으로 둘러싼 다섯 개의 봉우리가 모두 모나지 않고 연꽃잎에 싸인 연심(蓮心) 같아서 칭해졌다고도 하고, 신라 자장율사가 중국 유학 후 문수보살의 성지인 중국 오대산에서 가져왔다는 유래도 있다. 골짜기마다 사찰과 암자가 산재해 있어 불교 성지로 유명하며, 특히 지장율사가 643년 창건했다고 전하는 월정사와 조선시대 세조가 오대산을 방문했을 때 임시로 머물던 별궁인 상원암 행재소가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한 사고를 지었는데, 오대산 사고의 입지가 원래 물·불·바람이 침입하지 못한다는 상서로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등에서는 오대산 서대(西臺)의 우통수를 한강의 발원지라고 기록하였다.
" class="imgFile">Terrestrial Map
18세기 초반
종이에 묵서와 채색
19×15.3
북한산(北漢山)은 신라시대에는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진 이후 부아악이라 칭했고, 고려시대에는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의 세 봉우리가 삼각을 이룬 형태라고 해서 삼각산(三角山)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북한산성을 축성(1711년)한 이후 북한산을 별칭으로 사용하다가 일제강점기부터 정식으로 북한산을 산명으로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백두산을 우리 국토의 ‘뿌리’로 보고, 수도인 한양을 ‘중심’으로 보는 이원적 사고체계로 산을 이해하여 『산수고』에서도 백두산에서 시작된 산의 줄기가 한양으로 뻗어가도록 산맥을 체계화하고 있다. 한양도성을 풍수적 입장에서 해석하면 한북정맥에서 이어진 북한산이 한양의 진산이 되고, 여기서 내려온 산줄기가 경복궁을 감싸는 형세라 할 수 있다.
" class="imgFile">Geographical Maps
18세기 중엽
종이에 목판인쇄
14.2×9.2
태백산(太白山)은 국토 중앙에 위치한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여겨졌다. 비록 단군설화의 태백산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민족의 시원지로 인식되었으며, 신라시대부터 천제를 지내기 위한 중사(中祀)에 속했다. 고려시대에는 태백산 꼭대기에 전각을 세우고 국가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제사를 지내지는 않았으나, 지금까지 국가의 태평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한 조선 단종이 태백산 아래 영월로 유배되고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이후 태백산신이 되었다는 전설이 생기면서, 단종 산신각과 서낭당이 태백산 주변에 생겨났다. 선조 39년(1606년)에는 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태백산에 사고(史庫)를 설치했다.
" class="imgFile">Map of Gayasan Mountain
조선후기
종이에 목판인쇄
28.2×40
가야산(伽倻山)은 고대에 대가야국의 땅이라는 역사적 명칭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인도 불교성지 부다가야(Buddhagaya)의 부처의 설법처 가야산에서 이름을 가져왔다는 설이 있다.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의 이름이 ‘우두(牛頭)’였는데, 범어(梵語)로 ‘가야’는 소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야산은 선사시대부터 영산(靈山)으로 여겨졌으며, 정견모주를 가야산신으로 모셨고, 호국불교의 성지로 해인사에 고려팔만대장경을 600년이 넘게 고이 보존하고 있는 명산이다. 가야산은 최치원을 비롯하여 많은 문인들이 칭송한 명산으로 유람의 대상이기도 했다.
" class="imgFile">Map of the Eight Provinces in Joseon
조선후기
종이에 묵서와 채색
42×32
지리산(智異山)은 다름(차이)을 아는 것, 또는 다름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호칭으로 불려졌는데, 삼신산의 하나로 방장산(方丈山), 백두산의 맥이 흘러왔다고 해서 두류산(頭流山), 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뜻을 품고 명산을 순례할 때 지리산만 유독 응하지 않았다 해서 불복산(不伏山)이라고도 불렸다. 신라시대부터 삼산오악이라 하여 명산을 정해 제사를 지냈는데, 지리산은 오악 중에 남악(南嶽)으로 지정되어 조선까지 중사(中祀)를 계속 지냈다. 국토 남쪽을 수호하는 요충지인 지리산은 제일 높은 천왕봉을 비롯해 반야봉, 세석봉 등 1,000m 이상 되는 봉우리가 20여 개나 되는 높고 깊은 산이다.
" class="imgFile">Territorial Map of the Great East(Jeju Island)
김정호(1804?~1866?)
1861년
종이에 목판 인쇄 후 채색
30.6×40.2
한라산은 은하수(雲漢)를 잡아당길 수 있다(拏引) 뜻인데, 산이 높이 솟아 하늘과 맞닿아 은하수로 이어지는 신성한 산을 의미한다. 금강산, 지리산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이라 하여 영주산(瀛洲山)이라고도 칭했으며, 문헌에 의하면 조선 태종때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숙종대에는 치악산과 계룡산의 예에 의거하여 ‘소사(小祀)’에 등록하였으며, 어사(御使)가 제주에 방문하면 반드시 한라산제(漢拏山祭)를 올렸다고 한다. 실학자 이수광은 자신의 저서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백두대간이 지리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다 한 가운데로 뻗어나가 제주도의 한라산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여, 명실공히 우리 국토의 명산(名山)으로 인식했다.
" class="imgFile">Records and Paintings of Chilbosan Mountain
김수항(金壽恒), 한시각(韓時覺)
1874년
29.6×23.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역사적으로 산은 인간이 부여한 다양한 의미에 따라 활용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중앙집권제로 체제를 정비하면서 국토의 중요한 산을 오악(五嶽)으로 분류하여 정치적, 전략적 요충지로 삼았으며, 명산으로 불리는 곳에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산신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또한 경관이 빼어나고 지리적 가치가 뛰어난 산은 그 곳을 오르고 감상하며, 그 장엄함을 글과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인간은 산의 자원을 아낌없이 활용하기도 하고, 속세를 떠나 산 속에서 살기도 한다. 2부에서는 우리 삶에 깊게 스며있는 산의 다양한 기록을 통해 산과 함께 한 우리 삶의 흔적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 class="imgFile">Traveling East
송주상(宋周相)
1749년
종이에 묵서
29.9×51.6
국립문화재연구원 소장
송주상(宋周相 1695-1752)이 1749년 4월 13일부터 5월 22일까지 금강산과 관동승경을 유람한 일기와 관련 정보를 담은 기록이다.
“설악산 동쪽으로 높이 솟아 있는 한 줄기에는 기이한 바위들과 가파른 봉우리들이 전부가 모두 돌로 되어 있었는데, 그 중 특히 우뚝한 오봉(五峯)이 낙산의 주산(主山)이 되어 있었다. (而雪嶽東峙一支奇巖峭峯, 全體皆石, 特立五峯, 爲洛山之主山)
예나 지금이나 산을 오르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옛 선조들은 산을 오르는 행위를 ‘등산(登山)’이 아닌 ‘유산(遊山)’이라 하여 산에서 노닐며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며 심신을 도야(陶冶)하는 계기로 삼았다. 조선시대에는 유산(遊山)문화가 성행하여 명산을 방문하고 직접 유산기를 쓰기도 하고, 선현의 유산기를 읽고 선현 발자취를 따라 수양의 방법으로 산을 찾기도 하였다.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仁者樂山)’는 공자의 말처럼 산은 수기(修己)를 위한 자연 속 공간이며, 유산(遊山)은 정진(精進)의 과정이었다.
" class="imgFile">Figure wearing a Mino (straw cape)
1968년
사진
17.8×12.7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예로부터 깊은 산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을 우리는 화전민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삼림을 벌채하고 불을 놓아 토지를 만들어 곡식을 재배하였다. 춥고 해가 짧은 산 속에서 농사는 일 년 중 고작 몇 개월뿐이며, 나머지는 약초채집과 수렵으로 살아갔다.
사서 기록에 의하면 화전 마을의 시초는 삼국시대 두만강 유역의 산간오지에 있었던 외부세계와 단절된 ‘중골’이라는 승려들의 거주지라고 한다. 이러한 화전민은 삼국시대 이래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거쳐 현대까지 전국의 산지에 분포하였다.
이처럼 산은 산촌민에게는 삶의 터전이었다. 평지에서 땅을 일구고 살아갈 수 없던 이들에게 산은 넉넉하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리고 다양한 이유로 산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 사람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 class="imgFile">2015년 촬영 (국립문화재연구원 제공)
대구광역시 팔공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사찰 안에 산신각이 세워지는 현상은 19세기 이후로 보고 있는데, 민간의 산신신앙과 불교의 습합이 가속화되며 나왔다.
산은 신을 만나는 가장 가까운 장소이며, 신앙의 대상이다. 옛 조상들은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을 삼신산(三神山)이라 여겨 숭배하기도 했으며, 전국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마을의 뒷산을 주산(主山)이나 진산(鎭山)으로 여기고 정기적으로 산신제를 봉행하기도 하였다.
산신령은 산신, 산신할아버지, 산왕 등으로 불리며, 산명에 따라 태백산 산신령, 지리산 산신령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산신들은 가야산의 정견모주나 태백산의 단종처럼 나라를 다스리던 통치자가 사후에 산의 주인으로 신격화된 경우도 있다.
지금까지도 매년 개천절에는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고 있으며, 조선시대부터 사찰에도 불교의 토착화와 함께 산신을 봉안하는 산신각(山神閣)을 갖추었다. 또한 산신제는 산악신앙의 변모된 형태로 마을 수호신에 대한 신앙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마을 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명산으로 알려진 산과 인근 마을에서 산신제가 행해졌다.
" class="imgFile">조선시대 백두대간(白頭大幹)을 언급한 가장 오래된 실학자의 책은 1614년(광해군 6)에 완성한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로 조선에 있는 모든 산의 근본이 백두산이며, 마천령(摩天嶺)·철령(鐵嶺)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금강산·오대산·태백산이 되고 지리산까지 이어진다고 하였다. 또 남사고(南師古)의 말을 인용하여 이 산줄기가 백두대간(白頭大幹)이며, 바다 속으로 뻗어 제주도와 일본에까지 이어진다고 했다.
이러한 백두대간의 정보는 조선시대에 지속적으로 나타났으며, 1대간(大幹)·1정간(正幹)·13정맥(正脈) 체계로의 완성은 1770년 무렵 쓰여진『산경표(山經表)』에서 비롯되었다. 위의 지도는 박물관소장 <조선전도(朝鮮全圖)> 위에 산경표의 정보를 보여주고 있다.
Territorial Map of the Great East[Korea]
김정호(1804?~1866?)
1861년
종이에 목판 인쇄 후 채색
30.6×20.1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이러한 국토체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산줄기를 가장 눈에 띄도록 봉우리와 능선을 굵은 줄로 그리고, 높은 산은 위로 솟은 톱날 모양으로 표현했으며, 이름난 산은 묘사가 더 세밀하다. 백두산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가장 굵게 나타냈고, 정간과 정맥은 굵기를 달리했다. <대동여지도>는 우리 산의 맥락과 산줄기를 잘 표현한 명실상부한 대표적인 우리나라 고지도이다.
" class="imgFile">조선 후기에 주목할 만한 점은, 명산 지정에 있어 유학자를 중심으로 한 명산과 생활공간의 입지조건 그리고 수양 장소로서의 명산의 가치가 재발견된 점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나라의 큰 명산으로 12개의 산을 지정했으며, 명산의 장소성과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최원석, 「명산지정의 역사적 배경」, 『월간 산』, 2018.
조선 후기에 제작된 고지도는 당시 사람들의 명산에 대한 인식을 이해하는데 좋은 단서가 된다. 고지도에는 풍수지리 관념을 기반으로 한 국토의 중요한 산줄기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백두산으로 중심으로 뻗어가는 산줄기와 그 속의 명산을 상세히 표현하고 있다.
이 전시에는 10개의 산을 ‘명산’으로 선정하여 지도에서 보여주는 산의 표현과 지리적 입지를 함께 소개하고자 한다. 전시를 기획하며 선정한 10곳 외에도 계룡산, 설악산, 팔공산 등 예로부터 명산으로 꼽힌 산이 많지만, 공간의 한계로 제외하게 되었다는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10곳의 명산은 각 산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의미와 가치에 주목하였다. 영토의 종주(宗主), 백두대간의 중심, 유람의 대상, 신과 맟닿는 장소, 국가의 중요한 문서나 대장경 등의 보존이 유리한 장소성, 왕도의 선정과 국가의 번영에 중요한 장소성 등이 명산의 선정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는 이 전시에 제시될 고지도에 많이 기록된 산이기도 하다.
" class="imgFile">Map of the Eight Provinces in Joseon
18세기 중엽
종이에 묵서와 채색
64.5×48
백두산은 한국 고대문명의 중심지인 고조선, 고구려와 발해의 주요 무대였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종산(宗山)으로 지기(地氣)의 원천이며, 그 신령한 힘이 조선의 산천에 가지처럼 연결되어 뻗어간다고 믿었다. 이러한 유기적 국토관인 백두대간의 개념은 삼국시대 이후 풍수사상의 보급과 함께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국과의 경계지역으로 유목민족들이 활동하였던 곳이기도 했고, 특히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백두산을 자신들의 발상지이자 성지로 여겼다. 1712년 청은 조선과의 국경을 정하기 위해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웠으며, 한국전쟁 후에는 중국과 북한이 맺은 조약에 따라 현재까지 두 나라의 국경선이 천지 한가운데를 지나간다.
" class="imgFile">Terrestrial map
1817년
종이에 목판인쇄
30.3×33.7
묘향산(妙香山)은 산이 기묘하고 숲이 향기를 풍긴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불교에서는 역풍·순풍이 불 때 반대 방향에도 냄새를 풍기는 수묘(殊妙)한 향기를 뜻한다. 단군신화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삼국유사』에서 일연(一然)이 ‘태백산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이라고 하면서 우리 민족의 성지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묘향산은 12세기 말 농민반란의 근거지였고, 1216년 거란과의 전투가 있었던 곳이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이 전국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승을 일으킨 승병의 근거지였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全州史庫)에 소장된 조선왕조실록이 1597년 묘향산 보현사 별전으로 이전된 후 1605년부터 1633년까지 사고를 두어 실록을 보관하기도 하였다.
" class="imgFile">Territorial Map of the Great East
김정호(1804?~1866?)
조선, 1861년
종이에 목판 인쇄 후 채색
30.6×79.2
칠보산(七寶山)은 불교의 일곱 가지 보물이 산중에 묻혀 있다고 해서 지어졌다는 설과 먼 옛날 7개의 보물이 많은 산이 솟아오른 후 6개가 잠기고 한 개만 남아 칠보산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해진다. 함경도 지역의 외진 지정학적 위치로 다른 명산에 비해 기록은 적으나, 예로부터 ‘함북의 금강’이라 칭하였으며, 『택리지』에서는 칠보산의 아름다운 형세를 묘사하며 함경도에서는 칠보산만이 명산으로 꼽을만 하다고 평가였다. 칠보산의 특산물은 송이버섯인데,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 북한의 단골 선물이 바로 ‘칠보산 송이’이다.
" class="imgFile">Map of the Eastern Country
1800~1822년
종이에 묵서와 채색
82×58
금강(金剛)이란 말은 불교 경전 『화엄경』에 ‘해동에 보살이 사는 금강산이 있다’고 한 데서 유래했는데, 계절에 따라 개골·풍악·봉래 등의 이름으로 불려왔으며, 흔히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으로 나눈다. 금강산은 삼국시대부터 신라 화랑들이 유람하는 성산으로 숭배되었으며, ‘고려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 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라는 중국의 시인의 말이 전해질 정도로 고려시대부터는 타국에서도 명산으로 인정받았고, 조선 태종대에는 중국 사신이 금강산을 다녀간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많은 사대부들이 금강산 유람을 소망하며, 금강산은 사대부들의 대표적인 유람지였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30일 이상 소요되는 대장정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 지금도 많은 유산기(遊山記)와 정선, 김홍도 등이 그린 진경산수화가 남아있다.
" class="imgFile">Map of Gangneung District, Gangwon-do Province
1872년
종이에 묵서와 채색
83×138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오대산(五臺山)의 명칭은 꽃 모양으로 둘러싼 다섯 개의 봉우리가 모두 모나지 않고 연꽃잎에 싸인 연심(蓮心) 같아서 칭해졌다고도 하고, 신라 자장율사가 중국 유학 후 문수보살의 성지인 중국 오대산에서 가져왔다는 유래도 있다. 골짜기마다 사찰과 암자가 산재해 있어 불교 성지로 유명하며, 특히 지장율사가 643년 창건했다고 전하는 월정사와 조선시대 세조가 오대산을 방문했을 때 임시로 머물던 별궁인 상원암 행재소가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한 사고를 지었는데, 오대산 사고의 입지가 원래 물·불·바람이 침입하지 못한다는 상서로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등에서는 오대산 서대(西臺)의 우통수를 한강의 발원지라고 기록하였다.
" class="imgFile">Terrestrial Map
18세기 초반
종이에 묵서와 채색
19×15.3
북한산(北漢山)은 신라시대에는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진 이후 부아악이라 칭했고, 고려시대에는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의 세 봉우리가 삼각을 이룬 형태라고 해서 삼각산(三角山)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북한산성을 축성(1711년)한 이후 북한산을 별칭으로 사용하다가 일제강점기부터 정식으로 북한산을 산명으로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백두산을 우리 국토의 ‘뿌리’로 보고, 수도인 한양을 ‘중심’으로 보는 이원적 사고체계로 산을 이해하여 『산수고』에서도 백두산에서 시작된 산의 줄기가 한양으로 뻗어가도록 산맥을 체계화하고 있다. 한양도성을 풍수적 입장에서 해석하면 한북정맥에서 이어진 북한산이 한양의 진산이 되고, 여기서 내려온 산줄기가 경복궁을 감싸는 형세라 할 수 있다.
" class="imgFile">Geographical Maps
18세기 중엽
종이에 목판인쇄
14.2×9.2
태백산(太白山)은 국토 중앙에 위치한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여겨졌다. 비록 단군설화의 태백산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민족의 시원지로 인식되었으며, 신라시대부터 천제를 지내기 위한 중사(中祀)에 속했다. 고려시대에는 태백산 꼭대기에 전각을 세우고 국가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제사를 지내지는 않았으나, 지금까지 국가의 태평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한 조선 단종이 태백산 아래 영월로 유배되고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이후 태백산신이 되었다는 전설이 생기면서, 단종 산신각과 서낭당이 태백산 주변에 생겨났다. 선조 39년(1606년)에는 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태백산에 사고(史庫)를 설치했다.
" class="imgFile">Map of Gayasan Mountain
조선후기
종이에 목판인쇄
28.2×40
가야산(伽倻山)은 고대에 대가야국의 땅이라는 역사적 명칭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인도 불교성지 부다가야(Buddhagaya)의 부처의 설법처 가야산에서 이름을 가져왔다는 설이 있다.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의 이름이 ‘우두(牛頭)’였는데, 범어(梵語)로 ‘가야’는 소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야산은 선사시대부터 영산(靈山)으로 여겨졌으며, 정견모주를 가야산신으로 모셨고, 호국불교의 성지로 해인사에 고려팔만대장경을 600년이 넘게 고이 보존하고 있는 명산이다. 가야산은 최치원을 비롯하여 많은 문인들이 칭송한 명산으로 유람의 대상이기도 했다.
" class="imgFile">Map of the Eight Provinces in Joseon
조선후기
종이에 묵서와 채색
42×32
지리산(智異山)은 다름(차이)을 아는 것, 또는 다름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호칭으로 불려졌는데, 삼신산의 하나로 방장산(方丈山), 백두산의 맥이 흘러왔다고 해서 두류산(頭流山), 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뜻을 품고 명산을 순례할 때 지리산만 유독 응하지 않았다 해서 불복산(不伏山)이라고도 불렸다. 신라시대부터 삼산오악이라 하여 명산을 정해 제사를 지냈는데, 지리산은 오악 중에 남악(南嶽)으로 지정되어 조선까지 중사(中祀)를 계속 지냈다. 국토 남쪽을 수호하는 요충지인 지리산은 제일 높은 천왕봉을 비롯해 반야봉, 세석봉 등 1,000m 이상 되는 봉우리가 20여 개나 되는 높고 깊은 산이다.
" class="imgFile">Territorial Map of the Great East(Jeju Island)
김정호(1804?~1866?)
1861년
종이에 목판 인쇄 후 채색
30.6×40.2
한라산은 은하수(雲漢)를 잡아당길 수 있다(拏引) 뜻인데, 산이 높이 솟아 하늘과 맞닿아 은하수로 이어지는 신성한 산을 의미한다. 금강산, 지리산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이라 하여 영주산(瀛洲山)이라고도 칭했으며, 문헌에 의하면 조선 태종때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숙종대에는 치악산과 계룡산의 예에 의거하여 ‘소사(小祀)’에 등록하였으며, 어사(御使)가 제주에 방문하면 반드시 한라산제(漢拏山祭)를 올렸다고 한다. 실학자 이수광은 자신의 저서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백두대간이 지리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다 한 가운데로 뻗어나가 제주도의 한라산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여, 명실공히 우리 국토의 명산(名山)으로 인식했다.
" class="imgFile">Records and Paintings of Chilbosan Mountain
김수항(金壽恒), 한시각(韓時覺)
1874년
29.6×23.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역사적으로 산은 인간이 부여한 다양한 의미에 따라 활용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중앙집권제로 체제를 정비하면서 국토의 중요한 산을 오악(五嶽)으로 분류하여 정치적, 전략적 요충지로 삼았으며, 명산으로 불리는 곳에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산신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또한 경관이 빼어나고 지리적 가치가 뛰어난 산은 그 곳을 오르고 감상하며, 그 장엄함을 글과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인간은 산의 자원을 아낌없이 활용하기도 하고, 속세를 떠나 산 속에서 살기도 한다. 2부에서는 우리 삶에 깊게 스며있는 산의 다양한 기록을 통해 산과 함께 한 우리 삶의 흔적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 class="imgFile">Traveling East
송주상(宋周相)
1749년
종이에 묵서
29.9×51.6
국립문화재연구원 소장
송주상(宋周相 1695-1752)이 1749년 4월 13일부터 5월 22일까지 금강산과 관동승경을 유람한 일기와 관련 정보를 담은 기록이다.
“설악산 동쪽으로 높이 솟아 있는 한 줄기에는 기이한 바위들과 가파른 봉우리들이 전부가 모두 돌로 되어 있었는데, 그 중 특히 우뚝한 오봉(五峯)이 낙산의 주산(主山)이 되어 있었다. (而雪嶽東峙一支奇巖峭峯, 全體皆石, 特立五峯, 爲洛山之主山)
예나 지금이나 산을 오르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옛 선조들은 산을 오르는 행위를 ‘등산(登山)’이 아닌 ‘유산(遊山)’이라 하여 산에서 노닐며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며 심신을 도야(陶冶)하는 계기로 삼았다. 조선시대에는 유산(遊山)문화가 성행하여 명산을 방문하고 직접 유산기를 쓰기도 하고, 선현의 유산기를 읽고 선현 발자취를 따라 수양의 방법으로 산을 찾기도 하였다.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仁者樂山)’는 공자의 말처럼 산은 수기(修己)를 위한 자연 속 공간이며, 유산(遊山)은 정진(精進)의 과정이었다.
" class="imgFile">Figure wearing a Mino (straw cape)
1968년
사진
17.8×12.7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예로부터 깊은 산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을 우리는 화전민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삼림을 벌채하고 불을 놓아 토지를 만들어 곡식을 재배하였다. 춥고 해가 짧은 산 속에서 농사는 일 년 중 고작 몇 개월뿐이며, 나머지는 약초채집과 수렵으로 살아갔다.
사서 기록에 의하면 화전 마을의 시초는 삼국시대 두만강 유역의 산간오지에 있었던 외부세계와 단절된 ‘중골’이라는 승려들의 거주지라고 한다. 이러한 화전민은 삼국시대 이래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거쳐 현대까지 전국의 산지에 분포하였다.
이처럼 산은 산촌민에게는 삶의 터전이었다. 평지에서 땅을 일구고 살아갈 수 없던 이들에게 산은 넉넉하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리고 다양한 이유로 산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 사람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 class="imgFile">2015년 촬영 (국립문화재연구원 제공)
대구광역시 팔공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사찰 안에 산신각이 세워지는 현상은 19세기 이후로 보고 있는데, 민간의 산신신앙과 불교의 습합이 가속화되며 나왔다.
산은 신을 만나는 가장 가까운 장소이며, 신앙의 대상이다. 옛 조상들은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을 삼신산(三神山)이라 여겨 숭배하기도 했으며, 전국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마을의 뒷산을 주산(主山)이나 진산(鎭山)으로 여기고 정기적으로 산신제를 봉행하기도 하였다.
산신령은 산신, 산신할아버지, 산왕 등으로 불리며, 산명에 따라 태백산 산신령, 지리산 산신령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산신들은 가야산의 정견모주나 태백산의 단종처럼 나라를 다스리던 통치자가 사후에 산의 주인으로 신격화된 경우도 있다.
지금까지도 매년 개천절에는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고 있으며, 조선시대부터 사찰에도 불교의 토착화와 함께 산신을 봉안하는 산신각(山神閣)을 갖추었다. 또한 산신제는 산악신앙의 변모된 형태로 마을 수호신에 대한 신앙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마을 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명산으로 알려진 산과 인근 마을에서 산신제가 행해졌다.
" class="imgFile">백두산을 우리 국토의 뿌리로 보고, 이로부터 이어지는 산의 맥(脈)이 한반도의 전체에 서로 통한다는 국토 인식체계는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맥(脈)이란 살아있음을 가늠케 하는 기운(氣運)의 운행을 뜻하며, 산에서 숲, 도읍으로 이어지는 명당, 즉 살기 좋은 터전의 근간은 곧 기운의 운행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산맥은 단순한 산의 연결이 아닌 풍수적으로 의미 있는 해석이며 공간에 부여한 질서이다. 이러한 우리 국토 의식은 고지도에도 잘 드러나 있다.
조선시대 백두대간(白頭大幹)을 언급한 가장 오래된 실학자의 책은 1614년(광해군 6)에 완성한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로 조선에 있는 모든 산의 근본이 백두산이며, 마천령(摩天嶺)·철령(鐵嶺)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금강산·오대산·태백산이 되고 지리산까지 이어진다고 하였다. 또 남사고(南師古)의 말을 인용하여 이 산줄기가 백두대간(白頭大幹)이며, 바다 속으로 뻗어 제주도와 일본에까지 이어진다고 했다.
이러한 백두대간의 정보는 조선시대에 지속적으로 나타났으며, 1대간(大幹)·1정간(正幹)·13정맥(正脈) 체계로의 완성은 1770년 무렵 쓰여진『산경표(山經表)』에서 비롯되었다. 위의 지도는 박물관소장 <조선전도(朝鮮全圖)> 위에 산경표의 정보를 보여주고 있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Territorial Map of the Great East[Korea]
김정호(1804?~1866?)
1861년
종이에 목판 인쇄 후 채색
30.6×20.1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는 이러한 국토체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산줄기를 가장 눈에 띄도록 봉우리와 능선을 굵은 줄로 그리고, 높은 산은 위로 솟은 톱날 모양으로 표현했으며, 이름난 산은 묘사가 더 세밀하다. 백두산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가장 굵게 나타냈고, 정간과 정맥은 굵기를 달리했다. <대동여지도>는 우리 산의 맥락과 산줄기를 잘 표현한 명실상부한 대표적인 우리나라 고지도이다.
역사적으로 ‘명산’의 지정에는 정치·지리·문화적인 사상과 관념이 투영되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삼산·오악을 정하고, 대·중·소사의 대상으로 명산을 체계적으로 지정하였다. 고려시대에도 지정학적으로 상징적인 산을 선정할 뿐 아니라, 나라의 수호와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명산을 지정하고 산에서 천제를 올렸다.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의 중심지인 왕도와 국토의 영역에 맞추어 명산이 재편되었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전국적으로 42개의 명산이 기재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 주목할 만한 점은, 명산 지정에 있어 유학자를 중심으로 한 명산과 생활공간의 입지조건 그리고 수양 장소로서의 명산의 가치가 재발견된 점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는 나라의 큰 명산으로 12개의 산을 지정했으며, 명산의 장소성과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최원석, 「명산지정의 역사적 배경」, 『월간 산』, 2018.
조선 후기에 제작된 고지도는 당시 사람들의 명산에 대한 인식을 이해하는데 좋은 단서가 된다. 고지도에는 풍수지리 관념을 기반으로 한 국토의 중요한 산줄기가 상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백두산으로 중심으로 뻗어가는 산줄기와 그 속의 명산을 상세히 표현하고 있다.
이 전시에는 10개의 산을 ‘명산’으로 선정하여 지도에서 보여주는 산의 표현과 지리적 입지를 함께 소개하고자 한다. 전시를 기획하며 선정한 10곳 외에도 계룡산, 설악산, 팔공산 등 예로부터 명산으로 꼽힌 산이 많지만, 공간의 한계로 제외하게 되었다는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10곳의 명산은 각 산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의미와 가치에 주목하였다. 영토의 종주(宗主), 백두대간의 중심, 유람의 대상, 신과 맟닿는 장소, 국가의 중요한 문서나 대장경 등의 보존이 유리한 장소성, 왕도의 선정과 국가의 번영에 중요한 장소성 등이 명산의 선정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공통적으로는 이 전시에 제시될 고지도에 많이 기록된 산이기도 하다.
조선팔도여지전도(朝鮮八道輿地全圖) (함경도 부분)
Map of the Eight Provinces in Joseon
18세기 중엽
종이에 묵서와 채색
64.5×48
백두산은 한국 고대문명의 중심지인 고조선, 고구려와 발해의 주요 무대였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종산(宗山)으로 지기(地氣)의 원천이며, 그 신령한 힘이 조선의 산천에 가지처럼 연결되어 뻗어간다고 믿었다. 이러한 유기적 국토관인 백두대간의 개념은 삼국시대 이후 풍수사상의 보급과 함께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국과의 경계지역으로 유목민족들이 활동하였던 곳이기도 했고, 특히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백두산을 자신들의 발상지이자 성지로 여겼다. 1712년 청은 조선과의 국경을 정하기 위해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웠으며, 한국전쟁 후에는 중국과 북한이 맺은 조약에 따라 현재까지 두 나라의 국경선이 천지 한가운데를 지나간다.
여지도(輿地圖) (동국팔도대총도 부분)
Terrestrial map
1817년
종이에 목판인쇄
30.3×33.7
묘향산(妙香山)은 산이 기묘하고 숲이 향기를 풍긴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불교에서는 역풍·순풍이 불 때 반대 방향에도 냄새를 풍기는 수묘(殊妙)한 향기를 뜻한다. 단군신화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삼국유사』에서 일연(一然)이 ‘태백산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이라고 하면서 우리 민족의 성지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묘향산은 12세기 말 농민반란의 근거지였고, 1216년 거란과의 전투가 있었던 곳이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이 전국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승을 일으킨 승병의 근거지였다. 또한,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全州史庫)에 소장된 조선왕조실록이 1597년 묘향산 보현사 별전으로 이전된 후 1605년부터 1633년까지 사고를 두어 실록을 보관하기도 하였다.
해좌여도(海左輿圖) (제 5책 부분)
Territorial Map of the Great East
김정호(1804?~1866?)
조선, 1861년
종이에 목판 인쇄 후 채색
30.6×79.2
칠보산(七寶山)은 불교의 일곱 가지 보물이 산중에 묻혀 있다고 해서 지어졌다는 설과 먼 옛날 7개의 보물이 많은 산이 솟아오른 후 6개가 잠기고 한 개만 남아 칠보산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해진다. 함경도 지역의 외진 지정학적 위치로 다른 명산에 비해 기록은 적으나, 예로부터 ‘함북의 금강’이라 칭하였으며, 『택리지』에서는 칠보산의 아름다운 형세를 묘사하며 함경도에서는 칠보산만이 명산으로 꼽을만 하다고 평가였다. 칠보산의 특산물은 송이버섯인데,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 북한의 단골 선물이 바로 ‘칠보산 송이’이다.
동국지도(東國地圖) (강원도 부분)
Map of the Eastern Country
1800~1822년
종이에 묵서와 채색
82×58
금강(金剛)이란 말은 불교 경전 『화엄경』에 ‘해동에 보살이 사는 금강산이 있다’고 한 데서 유래했는데, 계절에 따라 개골·풍악·봉래 등의 이름으로 불려왔으며, 흔히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으로 나눈다. 금강산은 삼국시대부터 신라 화랑들이 유람하는 성산으로 숭배되었으며, ‘고려에 태어나서 금강산을 한 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라는 중국의 시인의 말이 전해질 정도로 고려시대부터는 타국에서도 명산으로 인정받았고, 조선 태종대에는 중국 사신이 금강산을 다녀간 기록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많은 사대부들이 금강산 유람을 소망하며, 금강산은 사대부들의 대표적인 유람지였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30일 이상 소요되는 대장정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겨 지금도 많은 유산기(遊山記)와 정선, 김홍도 등이 그린 진경산수화가 남아있다.
강릉부지도(江陵部地圖)
Map of Gangneung District, Gangwon-do Province
1872년
종이에 묵서와 채색
83×138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오대산(五臺山)의 명칭은 꽃 모양으로 둘러싼 다섯 개의 봉우리가 모두 모나지 않고 연꽃잎에 싸인 연심(蓮心) 같아서 칭해졌다고도 하고, 신라 자장율사가 중국 유학 후 문수보살의 성지인 중국 오대산에서 가져왔다는 유래도 있다. 골짜기마다 사찰과 암자가 산재해 있어 불교 성지로 유명하며, 특히 지장율사가 643년 창건했다고 전하는 월정사와 조선시대 세조가 오대산을 방문했을 때 임시로 머물던 별궁인 상원암 행재소가 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기 위한 사고를 지었는데, 오대산 사고의 입지가 원래 물·불·바람이 침입하지 못한다는 상서로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등에서는 오대산 서대(西臺)의 우통수를 한강의 발원지라고 기록하였다.
여지대전도(輿地大全圖) (양주목 부분)
Terrestrial Map
18세기 초반
종이에 묵서와 채색
19×15.3
북한산(北漢山)은 신라시대에는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진 이후 부아악이라 칭했고, 고려시대에는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의 세 봉우리가 삼각을 이룬 형태라고 해서 삼각산(三角山)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는 북한산성을 축성(1711년)한 이후 북한산을 별칭으로 사용하다가 일제강점기부터 정식으로 북한산을 산명으로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백두산을 우리 국토의 ‘뿌리’로 보고, 수도인 한양을 ‘중심’으로 보는 이원적 사고체계로 산을 이해하여 『산수고』에서도 백두산에서 시작된 산의 줄기가 한양으로 뻗어가도록 산맥을 체계화하고 있다. 한양도성을 풍수적 입장에서 해석하면 한북정맥에서 이어진 북한산이 한양의 진산이 되고, 여기서 내려온 산줄기가 경복궁을 감싸는 형세라 할 수 있다.
지도(地圖) (강원도 부분)
Geographical Maps
18세기 중엽
종이에 목판인쇄
14.2×9.2
태백산(太白山)은 국토 중앙에 위치한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여겨졌다. 비록 단군설화의 태백산은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민족의 시원지로 인식되었으며, 신라시대부터 천제를 지내기 위한 중사(中祀)에 속했다. 고려시대에는 태백산 꼭대기에 전각을 세우고 국가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제사를 지내지는 않았으나, 지금까지 국가의 태평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한 조선 단종이 태백산 아래 영월로 유배되고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이후 태백산신이 되었다는 전설이 생기면서, 단종 산신각과 서낭당이 태백산 주변에 생겨났다. 선조 39년(1606년)에는 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태백산에 사고(史庫)를 설치했다.
가야산도(伽倻山圖)
Map of Gayasan Mountain
조선후기
종이에 목판인쇄
28.2×40
가야산(伽倻山)은 고대에 대가야국의 땅이라는 역사적 명칭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인도 불교성지 부다가야(Buddhagaya)의 부처의 설법처 가야산에서 이름을 가져왔다는 설이 있다.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의 이름이 ‘우두(牛頭)’였는데, 범어(梵語)로 ‘가야’는 소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야산은 선사시대부터 영산(靈山)으로 여겨졌으며, 정견모주를 가야산신으로 모셨고, 호국불교의 성지로 해인사에 고려팔만대장경을 600년이 넘게 고이 보존하고 있는 명산이다. 가야산은 최치원을 비롯하여 많은 문인들이 칭송한 명산으로 유람의 대상이기도 했다.
팔도도(八道圖) (전라도 부분)
Map of the Eight Provinces in Joseon
조선후기
종이에 묵서와 채색
42×32
지리산(智異山)은 다름(차이)을 아는 것, 또는 다름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호칭으로 불려졌는데, 삼신산의 하나로 방장산(方丈山), 백두산의 맥이 흘러왔다고 해서 두류산(頭流山), 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뜻을 품고 명산을 순례할 때 지리산만 유독 응하지 않았다 해서 불복산(不伏山)이라고도 불렸다. 신라시대부터 삼산오악이라 하여 명산을 정해 제사를 지냈는데, 지리산은 오악 중에 남악(南嶽)으로 지정되어 조선까지 중사(中祀)를 계속 지냈다. 국토 남쪽을 수호하는 요충지인 지리산은 제일 높은 천왕봉을 비롯해 반야봉, 세석봉 등 1,000m 이상 되는 봉우리가 20여 개나 되는 높고 깊은 산이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21책 제주도 부분)
Territorial Map of the Great East(Jeju Island)
김정호(1804?~1866?)
1861년
종이에 목판 인쇄 후 채색
30.6×40.2
한라산은 은하수(雲漢)를 잡아당길 수 있다(拏引) 뜻인데, 산이 높이 솟아 하늘과 맞닿아 은하수로 이어지는 신성한 산을 의미한다. 금강산, 지리산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이라 하여 영주산(瀛洲山)이라고도 칭했으며, 문헌에 의하면 조선 태종때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숙종대에는 치악산과 계룡산의 예에 의거하여 ‘소사(小祀)’에 등록하였으며, 어사(御使)가 제주에 방문하면 반드시 한라산제(漢拏山祭)를 올렸다고 한다. 실학자 이수광은 자신의 저서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백두대간이 지리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다 한 가운데로 뻗어나가 제주도의 한라산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여, 명실공히 우리 국토의 명산(名山)으로 인식했다.
북관수창록(北關酬唱錄)
Records and Paintings of Chilbosan Mountain
김수항(金壽恒), 한시각(韓時覺)
1874년
29.6×23.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역사적으로 산은 인간이 부여한 다양한 의미에 따라 활용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중앙집권제로 체제를 정비하면서 국토의 중요한 산을 오악(五嶽)으로 분류하여 정치적, 전략적 요충지로 삼았으며, 명산으로 불리는 곳에서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산신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또한 경관이 빼어나고 지리적 가치가 뛰어난 산은 그 곳을 오르고 감상하며, 그 장엄함을 글과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인간은 산의 자원을 아낌없이 활용하기도 하고, 속세를 떠나 산 속에서 살기도 한다. 2부에서는 우리 삶에 깊게 스며있는 산의 다양한 기록을 통해 산과 함께 한 우리 삶의 흔적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동유일기(東遊日記)
Traveling East
송주상(宋周相)
1749년
종이에 묵서
29.9×51.6
국립문화재연구원 소장
송주상(宋周相 1695-1752)이 1749년 4월 13일부터 5월 22일까지 금강산과 관동승경을 유람한 일기와 관련 정보를 담은 기록이다.
“설악산 동쪽으로 높이 솟아 있는 한 줄기에는 기이한 바위들과 가파른 봉우리들이 전부가 모두 돌로 되어 있었는데, 그 중 특히 우뚝한 오봉(五峯)이 낙산의 주산(主山)이 되어 있었다. (而雪嶽東峙一支奇巖峭峯, 全體皆石, 特立五峯, 爲洛山之主山)
예나 지금이나 산을 오르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옛 선조들은 산을 오르는 행위를 ‘등산(登山)’이 아닌 ‘유산(遊山)’이라 하여 산에서 노닐며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며 심신을 도야(陶冶)하는 계기로 삼았다. 조선시대에는 유산(遊山)문화가 성행하여 명산을 방문하고 직접 유산기를 쓰기도 하고, 선현의 유산기를 읽고 선현 발자취를 따라 수양의 방법으로 산을 찾기도 하였다.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仁者樂山)’는 공자의 말처럼 산은 수기(修己)를 위한 자연 속 공간이며, 유산(遊山)은 정진(精進)의 과정이었다.
도롱이(蓑)
Figure wearing a Mino (straw cape)
1968년
사진
17.8×12.7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예로부터 깊은 산을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을 우리는 화전민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삼림을 벌채하고 불을 놓아 토지를 만들어 곡식을 재배하였다. 춥고 해가 짧은 산 속에서 농사는 일 년 중 고작 몇 개월뿐이며, 나머지는 약초채집과 수렵으로 살아갔다.
사서 기록에 의하면 화전 마을의 시초는 삼국시대 두만강 유역의 산간오지에 있었던 외부세계와 단절된 ‘중골’이라는 승려들의 거주지라고 한다. 이러한 화전민은 삼국시대 이래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거쳐 현대까지 전국의 산지에 분포하였다.
이처럼 산은 산촌민에게는 삶의 터전이었다. 평지에서 땅을 일구고 살아갈 수 없던 이들에게 산은 넉넉하게 자리를 내어주었다. 그리고 다양한 이유로 산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 사람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파계사 산령각
2015년 촬영 (국립문화재연구원 제공)
대구광역시 팔공산 서쪽 기슭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사찰 안에 산신각이 세워지는 현상은 19세기 이후로 보고 있는데, 민간의 산신신앙과 불교의 습합이 가속화되며 나왔다.
산은 신을 만나는 가장 가까운 장소이며, 신앙의 대상이다. 옛 조상들은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을 삼신산(三神山)이라 여겨 숭배하기도 했으며, 전국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마을의 뒷산을 주산(主山)이나 진산(鎭山)으로 여기고 정기적으로 산신제를 봉행하기도 하였다.
산신령은 산신, 산신할아버지, 산왕 등으로 불리며, 산명에 따라 태백산 산신령, 지리산 산신령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산신들은 가야산의 정견모주나 태백산의 단종처럼 나라를 다스리던 통치자가 사후에 산의 주인으로 신격화된 경우도 있다.
지금까지도 매년 개천절에는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고 있으며, 조선시대부터 사찰에도 불교의 토착화와 함께 산신을 봉안하는 산신각(山神閣)을 갖추었다. 또한 산신제는 산악신앙의 변모된 형태로 마을 수호신에 대한 신앙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통적으로 마을 공동체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해 명산으로 알려진 산과 인근 마을에서 산신제가 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