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K-뮤지엄 지역 순회 전시 및 투어 지원사업
2026 성신학원 창립 90주년·성신여자대학교박물관 개관 60주년 기념 특별전
옛 세계지도 속 우리나라 《질서 아래 놓여 있다》
초록이 깊어가는 여름,
성신학원 창립 90주년·성신여자대학교박물관 개관 60주년 기념
특별기획전 옛 세계지도 속 우리나라 《질서 아래 놓여 있다》를 개최합니다.
지도는 땅의 윤곽만을 담지 않습니다.
그것을 그린 사람들의 믿음과 상상, 권력과 세계관이
선 하나하나에 담겨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조선의 시선으로 그려진 세계, 세계의 시선 속에 놓인 조선, 그 모든 시선은 저마다의 질서를 통해 지도에 새겨져 있음을 보여주려 합니다.
선인들이 세계를 상상하고 그려냈듯,
저마다의 눈으로 지도를 읽는 뜻깊은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관람 안내
- 전시 기간: 2026년 7월 15일(수) - 9월 19일(토)
- 전시 장소: 성신여자대학교 수정캠퍼스 행정관 3층 박물관 전시실
- 관람 시간: 월 - 토 10:00 - 17:00 / 점심시간 12:00 - 13:00 휴관
일요일, 공휴일(제헌절, 광복절, 광복절 대체공휴일) 휴관
주최|문화체육관광부
주관|한국박물관협회
운영|성신여자대학교박물관
[전시개요]
조선이 세계를 보는 시선
세계가 조선을 보는 시선
모두 질서 아래 놓여 있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을 인식하고 기록하려는 욕구를 표출해왔습니다. 선사시대 동굴 벽화나 암각화에 사냥터와 채집지를 표시한 행위가 그 시초로, 공간 정보를 시각적으로 구조화한 가장 원초적인 지도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지도는 인간의 활동 범위 확장과 함께 당대의 지식과 권력, 세계관을 담는 복합적 매체로 발전하였습니다. 특히 세계지도는 각 시대와 문화권이 인식한 세계를 시각적으로 재현한 결과물로, 세계를 이해하고 체계화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실제 지형에 가까운 지도를 추구하기도 하고, 종교적 세계관에 따라 세계를 재구성하기도 하면서, 선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를 기록해왔습니다. 이 전시에서는 그러한 선인들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들이 세계를 어떻게 상상하고 기록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프롤로그]
천하는 매우 넓고, 나라의 크고 작음은 서로 다르나 모두 질서 아래 놓여 있다
이 세계를 담아낸 지도는 비록 작은 형체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담긴 세계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헤아릴 수 없다.
작은 한 장의 지도 속에는
인간이 이해하고자 했던 세계와 그 너머를 향한 사유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세계世界라는 말은 지구 전체를 가리키는 물리적 공간에서 개인의 내면 영역에 이르기까지 그 범주가 다양합니다. 인간은 보이는 세계를 탐구하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를 통해 대상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해왔습니다. 이러한 인식의 틀이 바로 '세계관世界觀'입니다.
과거의 세계지도는 단순한 지리 정보를 넘어 미지의 공간에 대한 상상과 해석, 그리고 당대 선인들의 세계관이 투영된 기록물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군주들은 자국의 세계관이 담긴 지도를 제작하고자 했습니다. 세계 질서 속에서 자국의 위치를 확인하고, 세계관을 백성들과 공유함으로써 국가의 정체성과 통치 질서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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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영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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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에서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외부 세계는 오늘날과 같은 '외국外國'의 개념보다는 '다른 부족' 혹은 '다른 세력'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 접어들면서 중국·일본은 물론 북방 민족·동남아시아·이슬람 국가와의 교류가 이어지며 상대를 독립된 정치 공동체로 인정하는 '타국他國' 인식이 형성되었습니다. 낯선 언어와 문물이 오가는 만남의 자리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딛고 선 땅 너머의 세계를 조금씩 실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은 한층 더 체계화되었습니다. '외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동아시아를 넘어 서양 문명까지 아우르는 세계 인식이 싹텄고, 넓어진 시야는 지도 위에 담겼습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와 같은 세계지도에는 중국과 일본을 넘어 아라비아, 아프리카, 유럽까지의 지리 정보가 펼쳐져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세계지도는 단순히 땅의 위치를 기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국가 간의 관계와 질서를 시각화한 지도 안에서 세계를 이해하려고 했던 조선 사람들의 지적 열망을 담아둔 것입니다.
원형천하도
조선은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을 연이어 겪으며 국제 질서의 급격한 변동을 경험하였습니다. 명明이 쇠퇴하고 청淸이 중원을 장악하는 격동 속에서 조선 지식인들은 변화하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를 고민하였습니다. 원형천하도圓形天下圖는 바로 그러한 시대적 긴장 속에서 제작된 세계 인식의 기록입니다.
원형의 동심원 구조를 기본 틀로 삼아, 중심부에 중국을 배치하고 그 바깥으로 내대륙內大陸, 내해內海, 외대륙外大陸, 외해外海를 순차적으로 배열하는 우주론적 구성을 보입니다.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전통적 우주관을 시각화한 것으로, 지리적 실측보다는 세계의 구조와 질서를 관념적으로 표현하려고 한 것입니다. 지도에 표기된 지명들 역시 실재하는 지역과 신화적·허구적 지명이 혼재하며, 지리적 정확성보다는 세계 인식의 구조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불교적 세계관 지도
고려시대까지 불교는 대표적인 종교로서 사회 다방면에 걸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불교적 세계관을 반영한 지도 역시 활발히 제작되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유교가 사회 운영의 근본 원리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불교는 상대적으로 위축되었고, 불교적 세계관을 표현한 지도 제작 또한 매우 드물었습니다. 불교적 세계인식에 입각한 지도에는 인도가 중앙에 위치하였고 동쪽에 아시아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서구식 지도학이 반영된 지도
서구식 세계지도는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1582년 중국에 도착하면서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서양의 지리 지식을 중국의 전통적 세계관과 접목한 세계지도를 십여 종 간행하였으며, 그 중 1602년 제작된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전통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던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지구가 둥글다는 서양의 지리 인식과 유럽·아프리카·아메리카 등 기존 세계지도에서 보기 어려웠던 지역들이 상세히 담긴 서구식 세계지도는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선에 유입된 서구식 세계지도는 중요한 자료로 여겨져 관상감觀象監에서 모사되었으며, 1708년(숙종 34)에 제작된 <곤여만국전도>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왕명에 따라 영의정이 주관하고 당대 최고의 화가가 모사에 참여한 사실은 서양 지도에 대한 조선의 높은 관심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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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天文은 지리와 더불어 국가를 경영하는 데 핵심적인 학문으로 중시되었습니다. 천체의 운행을 바탕으로 정확한 역법曆法을 제작하는 것은 농경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며, 절기의 변화와 기상 현상을 예측하여 백성들의 농업 활동과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왕립 천문관측기관을 설치하고, 천문대와 다양한 관측기기를 개발하여 천상과 기상의 변화를 체계적으로 살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서운관書雲觀이 천문·역법·기상을 전담하는 국가 기관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세종 대에는 혼천의渾天儀·간의簡儀·앙부일구仰釜日晷·자격루自擊漏 등 다양한 천문 관측기기와 시간 측정기기가 제작되며 천문학이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천문 지식은 단순히 별을 관측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를 이해하고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기능하였습니다. 조선의 왕이 하늘의 뜻을 헤아려 역을 반포하고 절기를 선포하는 행위는 세계의 질서를 주재하는 군주로서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천문도와 세계지도는 서로 다른 대상을 담고 있지만, 모두 '질서 아래 놓인 세계'를 시각화하려는 동일한 지적 의지의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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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서 이어진 외교의 길
지도에 그려진 세계를 따라 조선은 땅과 바다를 건너 나아갔습니다. 조선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는 외교 원칙을 바탕으로 주변 나라들과 관계를 맺으며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였습니다. 변화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원활한 외교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조선은 외교와 의례에 관한 절차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이러한 외교서는 사신의 역할과 의례의 순서, 외교 절차 등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며 조선과 타국 간 교류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조선의 사신단에게 수천 리에 이르는 사행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육로와 바닷길을 따라 낯선 지역을 지나며 새로운 풍경과 문물을 접하였고, 이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여 외국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시문과 필담을 통해 상대국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지식을 나누고 서로를 알아갔습니다. 사행 과정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세계는 조선의 시야를 넓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경계 너머에서 바라본 조선
조선은 사절단의 왕래를 비롯한 공식 외교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한 표류와 항해, 상업 활동, 종교와 학문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세계와 교류하였습니다. 낯선 바다를 떠돌다 조선에 이르게 된 이방인들은 조선의 사회와 문화,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직접 경험하였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반대로 조선인들 또한 외부 세계를 접하며 세계 인식을 넓혀 나갔습니다.
17세기 이후 해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조선에 대한 정보는 점차 동아시아를 넘어 서양 세계에도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네덜란드인 하멜Hendrik Hamel, 1630-1692의 표류 경험과 서양 선교사들의 기록, 중국을 통해 전해진 지리 지식 등은 조선을 소개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조선의 이름은 서양의 지도 위에 새겨지기 시작했고, 섬으로 그려지는 등 불분명했던 형태도 점차 실제의 반도 지형에 가까워졌습니다. 타국에서 만들어진 지도에 담긴 조선의 모습은 세계가 조선을 바라본 시선의 흔적이자, 동시에 조선이 세계와 연결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통신사 사행 복식
통신사 사행 인원은 크게 사절단을 대표하는 사신使臣 3인(정사正使·부사副使·종사관從事官)과 여러 원역員役·군관 등으로 구성됩니다. 이들은 사행 일정 중 상황과 의례의 성격에 따라 옷차림을 달리 하였습니다. 장거리 이동 시에는 도포·창의 등의 편복을 입었고, 행렬·의례·연향과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신분과 직분에 따라 조복·흑단령·시복 단령·융복 등을 입었습니다. 이 가운데 조복은 사신만 착용할 수 있었고, 사신이 조복을 입는 상황에서 그 이하 원역은 단령을 착용하였습니다. 사로승구도를 비롯한 18-19세기 여러 사행 기록을 통해서도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는 전명의傳命儀에서 사신은 금관조복, 원역은 흑단령, 군관은 융복을 착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17세기 중반 효종 대 이후 4품 이상은 조복, 5품 이하는 흑단령을 착용하도록 한 제도가 반영된 결과로 보입니다. 특히 사행 인원 가운데 사신 3인 외에도 4품 이상의 관원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조복 착용이 사신에게만 한정된 점은 다른 사행 인원과 구별되는 사신의 권위와 위엄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양 지도에 그려진 조선
지도는 당대 사람들이 알고 있던 타국에 대한 지식을 모아 만든 결과물입니다. 조선과 멀리 떨어진 서양에서도 직·간접적인 교류를 통해 조선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해 왔으며, 이러한 인식은 지도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서양의 옛 지도에 표현된 조선의 모습과 명칭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은 세계가 조선을 이해했던 흐름을 보여줍니다.
16세기 중반까지 서양에는 조선의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아 지도에 그려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에 들어 동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중국과 일본 사이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이 인식되었고, 점차 지도에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조선을 나라가 아닌 지역으로 표기하거나 섬 또는 길게 뻗은 반도, 해안의 일부처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18세기에 이르러 조선에 대한 이해가 발전하면서 지도에도 비교적 정확한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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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오래전부터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고, 미지의 땅을 기록하며 낯선 존재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지도 한 장에는 지리 정보만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던 시선과 태도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선인들은 교류와 외교 활동을 통해 얻은 지식을 지도와 글로 담아내며 세계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때로는 실제보다 크게, 때로는 낯선 상상으로 채워진 지도들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세상을 알아가며 세계 속에서 질서를 만들어 나간 흔적입니다.
오늘날 세계 속 대한민국의 모습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결과가 아닙니다. 옛 지도를 그리던 선인들이 그랬듯, 세대를 이어 시선을 넓히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며 자신만의 가치를 만들어 온 오랜 시간의 축적이 만든 결과물입니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 또한 계속 넓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이해하고 서로를 마주하려는 태도 만큼은 지금 이 자리에 펼쳐진 오래된 지도들을 그린 사람들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한 장의 지도 위에 담았던 세계를 향한 시선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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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개요]
조선이 세계를 보는 시선
세계가 조선을 보는 시선
모두 질서 아래 놓여 있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을 인식하고 기록하려는 욕구를 표출해왔습니다. 선사시대 동굴 벽화나 암각화에 사냥터와 채집지를 표시한 행위가 그 시초로, 공간 정보를 시각적으로 구조화한 가장 원초적인 지도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지도는 인간의 활동 범위 확장과 함께 당대의 지식과 권력, 세계관을 담는 복합적 매체로 발전하였습니다. 특히 세계지도는 각 시대와 문화권이 인식한 세계를 시각적으로 재현한 결과물로, 세계를 이해하고 체계화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실제 지형에 가까운 지도를 추구하기도 하고, 종교적 세계관에 따라 세계를 재구성하기도 하면서, 선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를 기록해왔습니다. 이 전시에서는 그러한 선인들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들이 세계를 어떻게 상상하고 기록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프롤로그]
천하는 매우 넓고, 나라의 크고 작음은 서로 다르나 모두 질서 아래 놓여 있다
이 세계를 담아낸 지도는 비록 작은 형체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담긴 세계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헤아릴 수 없다.
작은 한 장의 지도 속에는
인간이 이해하고자 했던 세계와 그 너머를 향한 사유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세계世界라는 말은 지구 전체를 가리키는 물리적 공간에서 개인의 내면 영역에 이르기까지 그 범주가 다양합니다. 인간은 보이는 세계를 탐구하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를 통해 대상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해왔습니다. 이러한 인식의 틀이 바로 '세계관世界觀'입니다.
과거의 세계지도는 단순한 지리 정보를 넘어 미지의 공간에 대한 상상과 해석, 그리고 당대 선인들의 세계관이 투영된 기록물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군주들은 자국의 세계관이 담긴 지도를 제작하고자 했습니다. 세계 질서 속에서 자국의 위치를 확인하고, 세계관을 백성들과 공유함으로써 국가의 정체성과 통치 질서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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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에서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외부 세계는 오늘날과 같은 '외국外國'의 개념보다는 '다른 부족' 혹은 '다른 세력'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 접어들면서 중국·일본은 물론 북방 민족·동남아시아·이슬람 국가와의 교류가 이어지며 상대를 독립된 정치 공동체로 인정하는 '타국他國' 인식이 형성되었습니다. 낯선 언어와 문물이 오가는 만남의 자리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딛고 선 땅 너머의 세계를 조금씩 실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은 한층 더 체계화되었습니다. '외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동아시아를 넘어 서양 문명까지 아우르는 세계 인식이 싹텄고, 넓어진 시야는 지도 위에 담겼습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와 같은 세계지도에는 중국과 일본을 넘어 아라비아, 아프리카, 유럽까지의 지리 정보가 펼쳐져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세계지도는 단순히 땅의 위치를 기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국가 간의 관계와 질서를 시각화한 지도 안에서 세계를 이해하려고 했던 조선 사람들의 지적 열망을 담아둔 것입니다.
원형천하도
조선은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을 연이어 겪으며 국제 질서의 급격한 변동을 경험하였습니다. 명明이 쇠퇴하고 청淸이 중원을 장악하는 격동 속에서 조선 지식인들은 변화하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를 고민하였습니다. 원형천하도圓形天下圖는 바로 그러한 시대적 긴장 속에서 제작된 세계 인식의 기록입니다.
원형의 동심원 구조를 기본 틀로 삼아, 중심부에 중국을 배치하고 그 바깥으로 내대륙內大陸, 내해內海, 외대륙外大陸, 외해外海를 순차적으로 배열하는 우주론적 구성을 보입니다.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전통적 우주관을 시각화한 것으로, 지리적 실측보다는 세계의 구조와 질서를 관념적으로 표현하려고 한 것입니다. 지도에 표기된 지명들 역시 실재하는 지역과 신화적·허구적 지명이 혼재하며, 지리적 정확성보다는 세계 인식의 구조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불교적 세계관 지도
고려시대까지 불교는 대표적인 종교로서 사회 다방면에 걸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불교적 세계관을 반영한 지도 역시 활발히 제작되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유교가 사회 운영의 근본 원리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불교는 상대적으로 위축되었고, 불교적 세계관을 표현한 지도 제작 또한 매우 드물었습니다. 불교적 세계인식에 입각한 지도에는 인도가 중앙에 위치하였고 동쪽에 아시아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서구식 지도학이 반영된 지도
서구식 세계지도는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1582년 중국에 도착하면서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서양의 지리 지식을 중국의 전통적 세계관과 접목한 세계지도를 십여 종 간행하였으며, 그 중 1602년 제작된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전통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던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지구가 둥글다는 서양의 지리 인식과 유럽·아프리카·아메리카 등 기존 세계지도에서 보기 어려웠던 지역들이 상세히 담긴 서구식 세계지도는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선에 유입된 서구식 세계지도는 중요한 자료로 여겨져 관상감觀象監에서 모사되었으며, 1708년(숙종 34)에 제작된 <곤여만국전도>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왕명에 따라 영의정이 주관하고 당대 최고의 화가가 모사에 참여한 사실은 서양 지도에 대한 조선의 높은 관심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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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天文은 지리와 더불어 국가를 경영하는 데 핵심적인 학문으로 중시되었습니다. 천체의 운행을 바탕으로 정확한 역법曆法을 제작하는 것은 농경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며, 절기의 변화와 기상 현상을 예측하여 백성들의 농업 활동과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왕립 천문관측기관을 설치하고, 천문대와 다양한 관측기기를 개발하여 천상과 기상의 변화를 체계적으로 살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서운관書雲觀이 천문·역법·기상을 전담하는 국가 기관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세종 대에는 혼천의渾天儀·간의簡儀·앙부일구仰釜日晷·자격루自擊漏 등 다양한 천문 관측기기와 시간 측정기기가 제작되며 천문학이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천문 지식은 단순히 별을 관측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를 이해하고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기능하였습니다. 조선의 왕이 하늘의 뜻을 헤아려 역을 반포하고 절기를 선포하는 행위는 세계의 질서를 주재하는 군주로서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천문도와 세계지도는 서로 다른 대상을 담고 있지만, 모두 '질서 아래 놓인 세계'를 시각화하려는 동일한 지적 의지의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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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서 이어진 외교의 길
지도에 그려진 세계를 따라 조선은 땅과 바다를 건너 나아갔습니다. 조선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는 외교 원칙을 바탕으로 주변 나라들과 관계를 맺으며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였습니다. 변화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원활한 외교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조선은 외교와 의례에 관한 절차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이러한 외교서는 사신의 역할과 의례의 순서, 외교 절차 등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며 조선과 타국 간 교류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조선의 사신단에게 수천 리에 이르는 사행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육로와 바닷길을 따라 낯선 지역을 지나며 새로운 풍경과 문물을 접하였고, 이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여 외국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시문과 필담을 통해 상대국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지식을 나누고 서로를 알아갔습니다. 사행 과정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세계는 조선의 시야를 넓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경계 너머에서 바라본 조선
조선은 사절단의 왕래를 비롯한 공식 외교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한 표류와 항해, 상업 활동, 종교와 학문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세계와 교류하였습니다. 낯선 바다를 떠돌다 조선에 이르게 된 이방인들은 조선의 사회와 문화,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직접 경험하였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반대로 조선인들 또한 외부 세계를 접하며 세계 인식을 넓혀 나갔습니다.
17세기 이후 해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조선에 대한 정보는 점차 동아시아를 넘어 서양 세계에도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네덜란드인 하멜Hendrik Hamel, 1630-1692의 표류 경험과 서양 선교사들의 기록, 중국을 통해 전해진 지리 지식 등은 조선을 소개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조선의 이름은 서양의 지도 위에 새겨지기 시작했고, 섬으로 그려지는 등 불분명했던 형태도 점차 실제의 반도 지형에 가까워졌습니다. 타국에서 만들어진 지도에 담긴 조선의 모습은 세계가 조선을 바라본 시선의 흔적이자, 동시에 조선이 세계와 연결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통신사 사행 복식
통신사 사행 인원은 크게 사절단을 대표하는 사신使臣 3인(정사正使·부사副使·종사관從事官)과 여러 원역員役·군관 등으로 구성됩니다. 이들은 사행 일정 중 상황과 의례의 성격에 따라 옷차림을 달리 하였습니다. 장거리 이동 시에는 도포·창의 등의 편복을 입었고, 행렬·의례·연향과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신분과 직분에 따라 조복·흑단령·시복 단령·융복 등을 입었습니다. 이 가운데 조복은 사신만 착용할 수 있었고, 사신이 조복을 입는 상황에서 그 이하 원역은 단령을 착용하였습니다. 사로승구도를 비롯한 18-19세기 여러 사행 기록을 통해서도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는 전명의傳命儀에서 사신은 금관조복, 원역은 흑단령, 군관은 융복을 착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17세기 중반 효종 대 이후 4품 이상은 조복, 5품 이하는 흑단령을 착용하도록 한 제도가 반영된 결과로 보입니다. 특히 사행 인원 가운데 사신 3인 외에도 4품 이상의 관원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조복 착용이 사신에게만 한정된 점은 다른 사행 인원과 구별되는 사신의 권위와 위엄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양 지도에 그려진 조선
지도는 당대 사람들이 알고 있던 타국에 대한 지식을 모아 만든 결과물입니다. 조선과 멀리 떨어진 서양에서도 직·간접적인 교류를 통해 조선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해 왔으며, 이러한 인식은 지도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서양의 옛 지도에 표현된 조선의 모습과 명칭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은 세계가 조선을 이해했던 흐름을 보여줍니다.
16세기 중반까지 서양에는 조선의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아 지도에 그려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에 들어 동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중국과 일본 사이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이 인식되었고, 점차 지도에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조선을 나라가 아닌 지역으로 표기하거나 섬 또는 길게 뻗은 반도, 해안의 일부처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18세기에 이르러 조선에 대한 이해가 발전하면서 지도에도 비교적 정확한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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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오래전부터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고, 미지의 땅을 기록하며 낯선 존재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지도 한 장에는 지리 정보만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던 시선과 태도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선인들은 교류와 외교 활동을 통해 얻은 지식을 지도와 글로 담아내며 세계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때로는 실제보다 크게, 때로는 낯선 상상으로 채워진 지도들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세상을 알아가며 세계 속에서 질서를 만들어 나간 흔적입니다.
오늘날 세계 속 대한민국의 모습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결과가 아닙니다. 옛 지도를 그리던 선인들이 그랬듯, 세대를 이어 시선을 넓히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며 자신만의 가치를 만들어 온 오랜 시간의 축적이 만든 결과물입니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 또한 계속 넓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이해하고 서로를 마주하려는 태도 만큼은 지금 이 자리에 펼쳐진 오래된 지도들을 그린 사람들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한 장의 지도 위에 담았던 세계를 향한 시선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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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영상 중
[전시개요]
조선이 세계를 보는 시선
세계가 조선을 보는 시선
모두 질서 아래 놓여 있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자신이 살아가는 공간을 인식하고 기록하려는 욕구를 표출해왔습니다. 선사시대 동굴 벽화나 암각화에 사냥터와 채집지를 표시한 행위가 그 시초로, 공간 정보를 시각적으로 구조화한 가장 원초적인 지도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지도는 인간의 활동 범위 확장과 함께 당대의 지식과 권력, 세계관을 담는 복합적 매체로 발전하였습니다. 특히 세계지도는 각 시대와 문화권이 인식한 세계를 시각적으로 재현한 결과물로, 세계를 이해하고 체계화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실제 지형에 가까운 지도를 추구하기도 하고, 종교적 세계관에 따라 세계를 재구성하기도 하면서, 선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를 기록해왔습니다. 이 전시에서는 그러한 선인들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들이 세계를 어떻게 상상하고 기록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프롤로그]
천하는 매우 넓고, 나라의 크고 작음은 서로 다르나 모두 질서 아래 놓여 있다
이 세계를 담아낸 지도는 비록 작은 형체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 담긴 세계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헤아릴 수 없다.
작은 한 장의 지도 속에는
인간이 이해하고자 했던 세계와 그 너머를 향한 사유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세계世界라는 말은 지구 전체를 가리키는 물리적 공간에서 개인의 내면 영역에 이르기까지 그 범주가 다양합니다. 인간은 보이는 세계를 탐구하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를 통해 대상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해왔습니다. 이러한 인식의 틀이 바로 '세계관世界觀'입니다.
과거의 세계지도는 단순한 지리 정보를 넘어 미지의 공간에 대한 상상과 해석, 그리고 당대 선인들의 세계관이 투영된 기록물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군주들은 자국의 세계관이 담긴 지도를 제작하고자 했습니다. 세계 질서 속에서 자국의 위치를 확인하고, 세계관을 백성들과 공유함으로써 국가의 정체성과 통치 질서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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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영상 중
고조선에서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외부 세계는 오늘날과 같은 '외국外國'의 개념보다는 '다른 부족' 혹은 '다른 세력'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 접어들면서 중국·일본은 물론 북방 민족·동남아시아·이슬람 국가와의 교류가 이어지며 상대를 독립된 정치 공동체로 인정하는 '타국他國' 인식이 형성되었습니다. 낯선 언어와 문물이 오가는 만남의 자리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딛고 선 땅 너머의 세계를 조금씩 실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은 한층 더 체계화되었습니다. '외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동아시아를 넘어 서양 문명까지 아우르는 세계 인식이 싹텄고, 넓어진 시야는 지도 위에 담겼습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와 같은 세계지도에는 중국과 일본을 넘어 아라비아, 아프리카, 유럽까지의 지리 정보가 펼쳐져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세계지도는 단순히 땅의 위치를 기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국가 간의 관계와 질서를 시각화한 지도 안에서 세계를 이해하려고 했던 조선 사람들의 지적 열망을 담아둔 것입니다.
원형천하도
조선은 임진왜란(1592-1598)과 병자호란(1636-1637)을 연이어 겪으며 국제 질서의 급격한 변동을 경험하였습니다. 명明이 쇠퇴하고 청淸이 중원을 장악하는 격동 속에서 조선 지식인들은 변화하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인가를 고민하였습니다. 원형천하도圓形天下圖는 바로 그러한 시대적 긴장 속에서 제작된 세계 인식의 기록입니다.
원형의 동심원 구조를 기본 틀로 삼아, 중심부에 중국을 배치하고 그 바깥으로 내대륙內大陸, 내해內海, 외대륙外大陸, 외해外海를 순차적으로 배열하는 우주론적 구성을 보입니다.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전통적 우주관을 시각화한 것으로, 지리적 실측보다는 세계의 구조와 질서를 관념적으로 표현하려고 한 것입니다. 지도에 표기된 지명들 역시 실재하는 지역과 신화적·허구적 지명이 혼재하며, 지리적 정확성보다는 세계 인식의 구조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불교적 세계관 지도
고려시대까지 불교는 대표적인 종교로서 사회 다방면에 걸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불교적 세계관을 반영한 지도 역시 활발히 제작되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유교가 사회 운영의 근본 원리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불교는 상대적으로 위축되었고, 불교적 세계관을 표현한 지도 제작 또한 매우 드물었습니다. 불교적 세계인식에 입각한 지도에는 인도가 중앙에 위치하였고 동쪽에 아시아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서구식 지도학이 반영된 지도
서구식 세계지도는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가 1582년 중국에 도착하면서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서양의 지리 지식을 중국의 전통적 세계관과 접목한 세계지도를 십여 종 간행하였으며, 그 중 1602년 제작된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전통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던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지구가 둥글다는 서양의 지리 인식과 유럽·아프리카·아메리카 등 기존 세계지도에서 보기 어려웠던 지역들이 상세히 담긴 서구식 세계지도는 새로운 세계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선에 유입된 서구식 세계지도는 중요한 자료로 여겨져 관상감觀象監에서 모사되었으며, 1708년(숙종 34)에 제작된 <곤여만국전도>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왕명에 따라 영의정이 주관하고 당대 최고의 화가가 모사에 참여한 사실은 서양 지도에 대한 조선의 높은 관심을 보여줍니다.
천문天文은 지리와 더불어 국가를 경영하는 데 핵심적인 학문으로 중시되었습니다. 천체의 운행을 바탕으로 정확한 역법曆法을 제작하는 것은 농경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며, 절기의 변화와 기상 현상을 예측하여 백성들의 농업 활동과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왕립 천문관측기관을 설치하고, 천문대와 다양한 관측기기를 개발하여 천상과 기상의 변화를 체계적으로 살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서운관書雲觀이 천문·역법·기상을 전담하는 국가 기관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세종 대에는 혼천의渾天儀·간의簡儀·앙부일구仰釜日晷·자격루自擊漏 등 다양한 천문 관측기기와 시간 측정기기가 제작되며 천문학이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천문 지식은 단순히 별을 관측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를 이해하고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기능하였습니다. 조선의 왕이 하늘의 뜻을 헤아려 역을 반포하고 절기를 선포하는 행위는 세계의 질서를 주재하는 군주로서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천문도와 세계지도는 서로 다른 대상을 담고 있지만, 모두 '질서 아래 놓인 세계'를 시각화하려는 동일한 지적 의지의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계가 바라본 조선의 모습은 외교와 교류, 발걸음과 기록을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공식적인 외교 사절로서 중국과 일본으로 향한 사신들은 조선의 문물과 문화를 세계에 보여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외교를 위하여 조선에 방문한 외국의 사신, 서양의 선교사들, 또는 예상치 못한 풍랑에 떠밀려 낯선 조선 땅에 이르게 된 이방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조선의 자연과 지리, 사회 질서와 통치 체계, 일상 속 문화를 글과 그림으로 남기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기록은 세계로 전해져 조선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으며, 조선은 점차 두렵거나 미지의 땅이 아니라 독자적인 문화와 질서를 갖춘 나라로 인식되었습니다.
서양의 지도 위에 미지의 땅이었던 조선의 이름이 새겨지고, 그 윤곽이 점차 실제 모습에 가까워지는 과정 역시 외교와 표류, 기록을 통한 교류의 결과였습니다. 세계를 향해 나아간 사람들의 경험과 시선, 그리고 타국을 이해하려 했던 노력을 통해 세계가 점차 조선을 알게 되고, 지도와 기록에 남겨져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입니다. 과거 사람들이 세계를 바라보았던 다양한 시선과 만남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세계 또한 끊임없는 교류와 이해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도에서 이어진 외교의 길
지도에 그려진 세계를 따라 조선은 땅과 바다를 건너 나아갔습니다. 조선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는 외교 원칙을 바탕으로 주변 나라들과 관계를 맺으며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였습니다. 변화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원활한 외교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조선은 외교와 의례에 관한 절차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이러한 외교서는 사신의 역할과 의례의 순서, 외교 절차 등을 구체적으로 규정하며 조선과 타국 간 교류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조선의 사신단에게 수천 리에 이르는 사행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육로와 바닷길을 따라 낯선 지역을 지나며 새로운 풍경과 문물을 접하였고, 이를 글과 그림으로 기록하여 외국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시문과 필담을 통해 상대국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지식을 나누고 서로를 알아갔습니다. 사행 과정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세계는 조선의 시야를 넓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경계 너머에서 바라본 조선
조선은 사절단의 왕래를 비롯한 공식 외교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한 표류와 항해, 상업 활동, 종교와 학문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세계와 교류하였습니다. 낯선 바다를 떠돌다 조선에 이르게 된 이방인들은 조선의 사회와 문화,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직접 경험하였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반대로 조선인들 또한 외부 세계를 접하며 세계 인식을 넓혀 나갔습니다.
17세기 이후 해상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조선에 대한 정보는 점차 동아시아를 넘어 서양 세계에도 전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네덜란드인 하멜Hendrik Hamel, 1630-1692의 표류 경험과 서양 선교사들의 기록, 중국을 통해 전해진 지리 지식 등은 조선을 소개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조선의 이름은 서양의 지도 위에 새겨지기 시작했고, 섬으로 그려지는 등 불분명했던 형태도 점차 실제의 반도 지형에 가까워졌습니다. 타국에서 만들어진 지도에 담긴 조선의 모습은 세계가 조선을 바라본 시선의 흔적이자, 동시에 조선이 세계와 연결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통신사 사행 복식
통신사 사행 인원은 크게 사절단을 대표하는 사신使臣 3인(정사正使·부사副使·종사관從事官)과 여러 원역員役·군관 등으로 구성됩니다. 이들은 사행 일정 중 상황과 의례의 성격에 따라 옷차림을 달리 하였습니다. 장거리 이동 시에는 도포·창의 등의 편복을 입었고, 행렬·의례·연향과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신분과 직분에 따라 조복·흑단령·시복 단령·융복 등을 입었습니다. 이 가운데 조복은 사신만 착용할 수 있었고, 사신이 조복을 입는 상황에서 그 이하 원역은 단령을 착용하였습니다. 사로승구도를 비롯한 18-19세기 여러 사행 기록을 통해서도 조선 국왕의 국서를 전달하는 전명의傳命儀에서 사신은 금관조복, 원역은 흑단령, 군관은 융복을 착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는 17세기 중반 효종 대 이후 4품 이상은 조복, 5품 이하는 흑단령을 착용하도록 한 제도가 반영된 결과로 보입니다. 특히 사행 인원 가운데 사신 3인 외에도 4품 이상의 관원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조복 착용이 사신에게만 한정된 점은 다른 사행 인원과 구별되는 사신의 권위와 위엄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양 지도에 그려진 조선
지도는 당대 사람들이 알고 있던 타국에 대한 지식을 모아 만든 결과물입니다. 조선과 멀리 떨어진 서양에서도 직·간접적인 교류를 통해 조선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해 왔으며, 이러한 인식은 지도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서양의 옛 지도에 표현된 조선의 모습과 명칭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은 세계가 조선을 이해했던 흐름을 보여줍니다.
16세기 중반까지 서양에는 조선의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아 지도에 그려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에 들어 동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중국과 일본 사이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이 인식되었고, 점차 지도에 그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조선을 나라가 아닌 지역으로 표기하거나 섬 또는 길게 뻗은 반도, 해안의 일부처럼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18세기에 이르러 조선에 대한 이해가 발전하면서 지도에도 비교적 정확한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를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고, 미지의 땅을 기록하며 낯선 존재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지도 한 장에는 지리 정보만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던 시선과 태도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선인들은 교류와 외교 활동을 통해 얻은 지식을 지도와 글로 담아내며 세계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때로는 실제보다 크게, 때로는 낯선 상상으로 채워진 지도들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세상을 알아가며 세계 속에서 질서를 만들어 나간 흔적입니다.
오늘날 세계 속 대한민국의 모습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결과가 아닙니다. 옛 지도를 그리던 선인들이 그랬듯, 세대를 이어 시선을 넓히고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며 자신만의 가치를 만들어 온 오랜 시간의 축적이 만든 결과물입니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 또한 계속 넓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이해하고 서로를 마주하려는 태도 만큼은 지금 이 자리에 펼쳐진 오래된 지도들을 그린 사람들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한 장의 지도 위에 담았던 세계를 향한 시선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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