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지리 고미술 근현대미술 고미술·古美術 Antiquity fnctId=bbs,fnctNo=4172 38 건 게시물 검색 제목 작성자 공통(상단고정) 공지 게시글 게시글 리스트 막새기와(瓦當) 작성자 박물관 시대 삼국(8세기), 고려시대 등 크기 14.5*31.8 등록번호 1467 조회 3452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10.23 처마끝 기와의 한쪽 끝에 둥글게 모양을 낸 부분으로, 원형 와당은 수키와에 달리고 반월형은 암키와에 달리며 사각형은 서까래 끝에 달게 된다. 중국 전국시대에 이미 반월형의 와당이 유행하였고 이어서 원형의 와당이 구워져 진나라에 이르러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와당은 삼국시대 초까지는 중국 와당의 모방에 그치고 있었으나 그 후 독자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고구려의 와당은 연꽃무늬를 새긴 것이 대표적인데 가장자리의 선이 강직하고 뚜렷하다. 백제의 와당도 연꽃무늬가 많으나 테두리가 고구려의 것보다 넓고 부드럽게 처리되었다. 신라의 와당도 초기에는 단순한 연꽃무늬의 와당이 많았으나 통일신라시대에는 연판이 이중으로 겹쳐지면서 매우 아름답게 처리된다. 그 문양도 매우 다양하게 발전하여 연판무늬를 비롯하여 초화(草花), 인동(忍冬), 도깨비, 사자(獅子), 보상화(寶相花), 사람얼굴무늬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질이 점차 퇴화되자 도깨비, 봉황(鳳凰), 초화(草花)무늬 등 다양한 장식을 한 것들이 만들어지고,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좀 더 소박해지고 단순화된다.수막새 4점과 암막새 5점인 와당으로 출토지역과 문양이 다양하다. 우선 수막새는 연꽃무늬 바깥쪽은 연주문을 돌리고 안쪽에는 복엽의 연판이 새겨져 있다. 두 점의 상태는 양호하나 두 점은 훼손이 심하다. 암막새는 현태가 완전히 남아있지는 않으나 문양은 확실히 확인할 수 있다. 반달형 와전의 끝에 인동당초문이 눌러 찍혀있고, 만(卍)자문양이 찍힌 막새기와는 고려시대 전형적인 기와의 특징인 윌휘문(동그랗게 튀어나온 문양)이 보인다. 철제창( 鐵第槍 ) 작성자 박물관 시대 가야시대 크기 1.8*24.6 등록번호 1158 조회 1152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10.23 창은 긴 나무 자루 끝에 날을 물려 찌르거나 던지는 것으로, 예로부터 세계의 여러 곳에서 무기로 쓰여왔다. 나무자루에는 수피(樹皮) 수피(獸皮)의 끈을 감거나 수액(樹液)을 발라서 보강하고 장식하는 예가 많고, 또한 채색 조각으로 정교한 문양을 넣기도 한다. 창날은 흑요석 처트 등의 돌 뼈 뿔 대나무 금속을 재료로 하고, 그 형태는 다양하다. 그 모양에 따라 직창(直槍) 구창(鉤槍) 낫창 삼지창(三枝槍) 등으로 나누지만 끝이 뾰족한 유엽형(柳葉形)을 기본으로 한다. 창신은 자루 끝을 파서 삽입하거나 끈으로 묶어 수액 피치로 고정하였다. 그러나 죽창과 같이 대를 비스듬히 끊어서 그대로 사용하는 단순한 것도 있다. 창에 의해, 창을 쥔 사람은 노리는 대상물과 사이에 생긴 공간을 유효하게 지배할 수 있는데, 직접 찌르지 않고 던지는 경우에도 대상물에 상당히 육박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투창기(投槍器)를 써서 창을 멀리 날아가게 하고 명중률도 높이는 연구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투창기는 유럽 후기 구석기시대의 초기에 골제(骨製)의 것이 발견된 바 있다. 투창기의 용도는 주로 수렵용이며, 여기에 화살 곤봉 등을 곁들여 사용하였다. 남성들에 의해서 소유되고 사용되어 온 창은 전쟁이나 의식에도 중요한 도구가 되어 보기 좋게 장식된 것도 많고, 아내를 맞이할 때는 증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동 서 아프리카의 일부 민족은 창신을 화폐로 통용하기도 한다. 본 박물관의 긴 나무나 대끝에 부착하여 쓰던 창으로 가야식으로 전해진다. 철제복발(鐵製伏鉢) 작성자 박물관 시대 가야시대 크기 11*6.6 등록번호 1145 조회 989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10.23 철기시대에는 새로이 유입된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다양한 도구가 만들어졌다. 이들 도구는 크게 무기류와 농공구(農工具)로 나누어진다. 무기류에는 공격용 무기와 방어용 무기가 있다. 공격용 무기에는 검(劍), 고리칼(素環刀), 화살촉(鏃), 모(鉾), 꺽창(戈)등이 있다. 방어용 무기에는 갑옷과 투구 등이 있는데 이는 삼국시대 이후에나 출현된다. 농공구에는 칼, 도끼, 끌, 낚시, 송곳, 가래, 괭이 반달칼, 낫 등이 있다. 철기의 수량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인데, 이는 당시에 널리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부식성이 높아서 남아 있는 양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집터에서 나오는 경우도 있으나 무덤과 조개더미에서 많이 발견된다. 철의 생산은 서기전 3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지방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은대에 일부 철기가 사용되었다고 하나 주조의 철제농기구가 등장한 것은 춘추시대 후반부터이고 전국시대에 들어가서는 단조의 무기도 만들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초기에 중국에서 수입된 주조품도 있지만 두드려서 만든 단조품이 주류를 이루다가 후기에는 주조품이 많아진다. 이 시대의 제철기술은 해면철제조법과 선철제조법이 있다. 이 유물은 투구 정수리 부분을 덮어 가죽 등의 끈으로 투구의 본체와 연결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가장 중요한 정수리 부분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중심을 확고하게 고정시켜 중심유지를 위한 것이기 하였다. 철제도끼( 鐵斧 ) 작성자 박물관 시대 가야시대 크기 6*17 등록번호 1136 조회 1344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10.23 철기시대에는 새로이 유입된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다양한 도구가 만들어졌다. 이들 도구는 크게 무기류와 농공구(農工具)로 나누어진다. 무기류에는 공격용 무기와 방어용 무기가 있다. 공격용 무기에는 검(劍), 고리칼(素環刀), 화살촉(鏃), 모(鉾), 꺽창(戈)등이 있다. 방어용 무기에는 갑옷과 투구 등이 있는데 이는 삼국시대 이후에나 출현된다. 농공구에는 칼, 도끼, 끌, 낚시, 송곳, 가래, 괭이 반달칼, 낫 등이 있다. 철기의 수량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인데, 이는 당시에 널리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부식성이 높아서 남아 있는 양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집터에서 나오는 경우도 있으나 무덤과 조개더미에서 많이 발견된다. 철의 생산은 서기전 3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지방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은대에 일부 철기가 사용되었다고 하나 주조의 철제농기구가 등장한 것은 춘추시대 후반부터이고 전국시대에 들어가서는 단조의 무기도 만들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초기에 중국에서 수입된 주조품도 있지만 두드려서 만든 단조품이 주류를 이루다가 후기에는 주조품이 많아진다. 이 시대의 제철기술은 해면철제조법과 선철제조법이 있다.한국에서 출토된 도끼는 구석기시대의 타제품(打製品)에서부터 마제석부(磨製石斧) 등이 발견되었으며, 그 형태도 다양하여 직사각형의 양날, 끌 모양의 한쪽날, 그리고 다두형(多頭形) 또는 환석(環石) 등이 있고, 함북에서는 정(丁)자형의 타제석부 등이 나왔다. 이렇게 석부에서부터 시작된 한국의 도끼는 청동기 철기시대를 거치는 동안 점차 철제의 도끼가 나왔으며, 생활용품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변천하였다. 본 박물관의 것은 가야식의 도끼로 전해지며 도끼자루의 연결된 부분이 트여 있다. 토제마두(土製馬頭) 작성자 박물관 시대 원삼국시대 크기 9 등록번호 1119 조회 528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10.23 이 토제 마두는 토우의 일종으로서, 토우는 사람의 형상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생활용구, 집 등을 본떠 만든 것을 총괄해서 일컫는다. 고대에 토우는 장난감이나 애완용으로 만들어진 것, 주술적인 우상(偶像)으로서의 성격을 가진 것, 무덤에 넣기 위한 부장용(副葬用)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것들은 흙뿐 아니라 동물의 뿔이나 뼈, 나무 등으로 만든 것도 있고 드물게는 짚이나 풀 등으로 만든 것도 있다. 주술적인 의미를 가진 토우에는 특히 여성상이 많다. 이는 여성의 생식 능력과 토지의 생산력이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여 여성의 생산성을 신성시하던 지모신숭배(地母神崇拜)의 주술적 행위를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은 삼국시대의 신라, 가야에서 출토예가 풍부하고 다채로운 면모를 가지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그 예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조선시대에 오면 백자로 무덤에 인물 동물 생활용기 등을 만들어 명기(明器)라 하여 부장한 것이 있다. 원시시대 이래 동물에 대한 갖가지 표현은 동굴이나 바위에 벽화로서 나타나기도 하고 토용, 토우로서 나타나며 또 동양에서는 십이지(十二支)같이 구체성이 부여되기도 하였다. 고대의 제례에는 반드시 동물이 희생으로 바쳐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동물에 대한 생각은 신라, 가야인에게는 다양한 동물들로 표현된 토기, 토우, 토용 등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동물상은 장식용외에도 일종의 벽사(僻邪)의 주술을 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토제마두(土製馬頭)는 충청도지방 출토품으로 토우의 일종으로 여겨진다. 동물상은 벽사(僻邪)의 주술적 성격이 강하다. 한편으로는 부장품으로도 만들어졌는데, 특히 말, 배, 수레, 새 등의 토우는 죽은 사람을 저 세상으로 편안히 보내거나 죽은 뒤의 생활을 보장해주기 위한 목적에서 만들어 무덤에 묻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현각선사탑비편(玄覺禪師塔碑片) 작성자 박물관 시대 고려시대(979년) 크기 23.7*13.6 등록번호 833 조회 760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10.23 1963년 보물 제152호로 지정된 현각선사비는 979년(고려 경종 4) 건립된 것이다. 현재 비신은 없어졌고 높이 1.12m의 귀부(龜趺)와 높이 75cm의 이수(螭首)만 남아 있다. 귀부는 몸뚱이가 크게 절단되어 있고 비좌(碑座)의 네 측면에는 귀꽃과 안상(眼象)이 있으며, 이수에는 꿈틀거리는 용이 조각되어 있다.이 유물은 1974년 5월 10일 본교 국사교육과의 전라남도 구례 연곡사 답사중 습득한 것이다. 판각된 12글자는 선명하나 비(碑)의 극히 일부분의 파편이기 때문에 내용파악은 불가능하다. 동경(銅鏡) 작성자 박물관 시대 고려시대 크기 13.4*0.3 등록번호 747 조회 1409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10.23 거울은 청동제의 감(鑑 : 큰 대야)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측된다. 감의 안에 물을 담아 얼굴을 비추어 보다가 물이 없어도 얼굴이 비치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동경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에 이미 정교한 작품이 만들어졌으나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유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고려시대에는 많은 유물이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고려시대의 동경은 고려의 독자적인 동경과 중국의 동경을 본떠 만든 것 등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동경의 크기가 커지고 두께가 얇아지는 특징이 있다. 일반적인 형태와 특징 동경은 동판의 표면을 잘 다듬고 문질러 얼굴을 비추어 볼 수 있게 한 것으로, 뒷면에는 다양한 문양을 새겼다. 동경의 형태는 가장자리의 모양에 따라 원형, 방형, 장방형, 화형(花形), 능형(稜形)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동경은 중앙에 꼭지와 꼭지를 둘러싼 유좌(鈕座)가 있다. 유좌를 감싸는 것이 내구(內區)이다. 내구는 뒷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일반적으로 문양이 들어간다. 내구의 문양에 따라 동경의 특색이 나타난다. 내구에는 흔히 계권(界圈)이라고 부르는 구획이 있는데, 계권이 있는 경우 안쪽을 내구, 바깥쪽을 외구(外區)라고 부른다. 동경의 가장 바깥쪽은 연(緣)이라고 한다.이 동경은 원형으로 내구에 비둘기 두 마리와 초화문을 돋을새김으로 새겼고, 외구에도 초화문을 새겼다. 어망추(漁網錘) 작성자 박물관 시대 신석기 크기 1.8*4.7 등록번호 510 조회 1229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10.23 어망추는 그물을 만들어 물고기를 잡기 시작한 이래 현재까지 계속하여 쓰이고 있는 도구이다. 만든 재질에 따라 토제, 도제, 석제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신석기 시대의 어망추는 주로 자갈돌의 양측면을 깨뜨려 홈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신석기 시대에는 돌을 그대로 이용하였지만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는 흙으로 만든 토제품이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었다.이 어망추는 신석기 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석제 어망추이다. 길쭉한 타원형 돌의 가운데 부분을 앞뒤로 움푹하게 갈아서 실을 묶을 수 있도록 하였다. 처음 15 1 2 3 4 5 다음 페이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