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식 복식·服飾 Korean Costume fnctId=bbs,fnctNo=4173 15 건 게시물 검색 제목 작성자 공통(상단고정) 공지 게시글 게시글 리스트 태사혜( 太史鞋 ) 작성자 박물관 시대 조선시대 말기 크기 4.5*13.5 등록번호 525 조회 1681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10.23 신은 인간생활의 필요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생겼다. 원시시대의 신은 발을 보호하기 위한 간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생활문화의 발달에 따라 실용적인 목적 뿐 아니라 의례적, 장식적인 목적으로도 만들어져 다양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신은 형태상으로 화(靴)와 이(履)로 나눈다. 화는 긴 목이 붙어있는 장화같은 신이고, 이는 목이 짧은 신의 총칭이다. 신의 재료로는 가죽, 풀, 비단, 놋쇠, 종이, 나무 등이 있었고 신분과 용도에 따라 다른 재료를 사용하여 신을 만들었다.태사혜는 남자용 신의 한 종류이다. 울을 헝겊이나 가죽으로 하고 코와 뒤축에 흰 줄무늬를 새긴 것이다. 태사혜는 사대부나 양반 계급의 나이 많은 남자가 평상시에 신었다. 이 태사혜는 초록색 바탕에 붉은 색으로 무늬를 넣은 어린아이용 태사혜이다. 가죽신( 雲鞋 ) 작성자 박물관 시대 조선시대 말기 크기 6*23 등록번호 459 조회 1093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10.23 우리나라의 신은 형태상으로 화(靴)와 이(履)로 나눈다. 화는 긴 목이 붙어있는 장화같은 신이고, 이는 목이 짧은 신의 총칭이다. 신의 재료로는 가죽, 풀, 비단, 놋쇠, 종이, 나무 등이 있었고 신분과 용도에 따라 다른 재료를 사용하여 신을 만들었다.운혜는 마른신의 일종으로 앞부리와 뒤꿈치에 구름무늬가 있다. 온혜(溫鞋)라고도 한다. 궁혜, 당혜, 운혜는 겉의 무늬만 다를 뿐 형태가 같은 것으로 안에는 푹신한 감을 대고 겉은 비단으로 가죽을 싸서 만들었으며 바닥에는 징이 박혀 있다. 궁혜는 궁중용이며, 당혜는 코에 당초문을 놓았고, 운혜는 코와 뒤꿈치에 운문을 놓았다. 이 유물은 백운혜로서 하얀색 비단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나막신( 木鞋 ) 작성자 박물관 시대 조선시대 말기 크기 7.4*24.5 등록번호 295 조회 2096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10.23 중국에서는 극(屐)이라 하였고, 한국에서는 격지, 목극, 각색, 목리, 목혜 등 부르다가 조선 말기부터 나막신이라 하였는데 '나무신'이 와전된 것이다. 처나막신은 주로 비올때 신는 신발로서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대에도 있었는지는 확증할 문헌이나 유물이 없고 조선 중기 이후에 많은 기록과 유물을 볼 수 있다. 나막신이 처음 나타났을 때의 형태를 알 수는 없으나 처음에는 평판에 끈을 하였던 것이 차츰 사방에 울을 하게 되고 굽을 달아 극의 형식으로 발달하여 요즈음 볼 수 있는 나막신으로 변하였다. 나막신은 1910년 이후 고문신이 등장하자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고 질긴 고무신을 신게 되어 차츰 쇠퇴하여 1940년대를 전후하여서 거의 사라졌다.나막신의 형태는 평극, 굽이 있는 것, 굽이 없는 것, 굽에 징이 박힌 것 등이 있었는데, 조선후기에는 남자아이가 신는 채극(彩屐) 등이 있었고 평극은 보이지 않는다. 재료는 다양하게 사용되었는데 오동나무와 버드나무로 만든 것을 제일로 쳤다. 나무의 속성이 마르면 터지기 쉬우므로 밀을 녹여 겉에다 칠해서 납극(蠟屐)을 만들어 신기도 하였다. 나막신은 상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신었는데 굽이 높아서 비나 눈이 올때 좋으나 무겁고 활동적이 못되어 말을 탈때나 먼길을 갈때는 신지 않았다. 맑은 날에도 많이 신었으며 특히 어린 남자아이가 신었던 채극은 진신으로서뿐 만 아니라 마른신으로도 신었다. 이 나막신은 여자용으로 굽이 높으며 앞코에 꽃무늬가 음각으로 되어 있다. 당혜(唐鞋) 작성자 박물관 시대 조선시대 말기 크기 6.3*24.5 등록번호 271 조회 1632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10.23 신은 인간생활의 필요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생겼다. 원시시대의 신은 발을 보호하기 위한 간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생활문화의 발달에 따라 실용적인 목적 뿐 아니라 의례적, 장식적인 목적으로도 만들어져 다양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신은 형태상으로 화(靴)와 이(履)로 나눈다. 화는 긴 목이 붙어있는 장화같은 신이고, 이는 목이 짧은 신의 총칭이다. 신의 재료로는 가죽, 풀, 비단, 놋쇠, 종이, 나무 등이 있었고 신분과 용도에 따라 다른 재료를 사용하여 신을 만들었다.당혜는 통일신라시대에 당(唐)에서 전해진 뒤 조선시대 말까지 신은 부녀자들의 신발이다. 안에는 푹신한 감을 대고 겉은 비단으로 가죽을 싸서 만들었으며 코와 뒤축에 당초문을 놓았다. 오른쪽 왼쪽의 구별이 없어 오랜 시간 동안 걷기는 불편하였다. 이 당혜는 하얀색 바탕에 검은색으로 당초무늬를 놓았다. 진신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많은 징이 박혀있다. 진신(油鞋) 작성자 박물관 시대 조선시대 말기 크기 9*27.5 등록번호 269 조회 1239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10.23 신은 인간생활의 필요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생겼다. 원시시대의 신은 발을 보호하기 위한 간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생활문화의 발달에 따라 실용적인 목적 뿐 아니라 의례적, 장식적인 목적으로도 만들어져 다양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신은 형태상으로 화(靴)와 이(履)로 나눈다. 화는 긴 목이 붙어있는 장화같은 신이고, 이는 목이 짧은 신의 총칭이다. 신의 재료로는 가죽, 풀, 비단, 놋쇠, 종이, 나무 등이 있었고 신분과 용도에 따라 다른 재료를 사용하여 신을 만들었다.진신은 유혜(油鞋)라고도 하고, 징을 박았기 때문에 징신이라고도 한다. 진신은 삼국시대 이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생가죽을 기름에 절여 여러 겹 겹쳐 바닥을 만들고, 신등의 가장자리도 가죽으로 만들었다. 바닥에 지름 0.7cm 정도의 쇠붙이로 만든 징을 촘촘히 박았다. 값비싼 재료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상류계층에서 신은 신으로 보인다. 남자의 진신은 태사혜와 같은 모양이고, 여자의 진신은 당혜와 같은 모양이다. 이 진신은 태사혜와 같은 모양으로 생긴 남성용 진신이다. 코와 뒤축 부분에 줄무늬가 있다. 은투호노리개 작성자 박물관 시대 광복이후 크기 34 등록번호 1390 조회 1731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10.23 노리개는 고름에 거는 부분인 띠돈, 끈, 주체가 되는 패물, 매듭, 술로 구성된다. 띠돈은 주체가 되는 패물을 연결한 끈을 한곳에서 정리하기 위해 만든 고리로 고름에 걸게 되어 있다. 또 주체가 되는 패물은 한개 또는 세개를 다는데, 한개로 된 노리개는 단작노리개, 세개가 한 벌로 된 노리개는 삼작노리개라 하였다. 매듭은 주체를 중심으로 상하에 있어 주체를 아름답게 보이게 하기 위한 장식의 구실을 하는 것이며 그 밑에는 술이 달려 있다. 매듭과 술은 홍․남․황의 삼원색으로 기본색으로 하며 분홍․연두․보라․자주․옥색 등을 사용하는데 그 크기는 노리개에 다는 패물의 크기와 형태에 따라 달라진다. 노리개에 사용된 술의 종류로는 딸기술, 봉술, 끈술, 방울술이 있다.단작노리개로 패물은 투호 항아리 모양의 은제 패물이다. 투호는 옛날 궁중이나 양반집에서 청동 항아리에 화살을 던져넣어 많이 넣는 편이 이기는 놀이다. 이 패물에는 수(壽)자가 새겨져 있다. 매듭은 끈목매듭과 장순례매듭을 하였으며 술은 초록색의 방울술이다. 방울술은 주로 남자용 선추 끝에 다는 것으로 납작하게 짠 12絲로 연봉매듭을 맺고 그 끝을 금실이나 배색이 잘되는 색실로 감았다. 상투관(상투冠) 작성자 박물관 시대 조선시대 후기 크기 3.8*6.5 등록번호 658 조회 2315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10.23 상투관은 주로 상류층에서 사용하였다. 양관(조선시대에 문무백관이 조복과 제복을 입을 때 쓴 관)이나 원유관(조선시대 왕이 조복을 입을 때 쓰던 관)을 축소시킨 모양이다. 뿔 나무 종이 가죽에 흑칠을 하여 만들며, 머리 정돈과 머리장식품으로도 사용했다. 특히 머리숱이 적은 노인들이 쓸 때 사용한 것은 검은 종이나 베로 만들었다. 망건을 쓴 다음, 상투관을 쓰며 비녀를 꽂아 상투를 고정시켰다. 이 상투관은 원유관을 축소시킨 모양으로 쇠뿔을 조각하여 만들었으며 태극과 팔괘무늬를 양각하였다. 화관( 花冠 ) 작성자 박물관 시대 일제강점기(20세기) 크기 18*16 등록번호 654 조회 1511 첨부파일 0 작성일 2019.10.23 화관은 신라 문무왕때 중국의 복식이 들어오면서 함께 전래된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궁중에서 사용되었고, 고려시대에는 귀족과 양반계급의 부녀자 예복에 쓰였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크기가 작아져 머리에 쓰는 관모라기보다는 미적 장식품으로 얹는 머리 장식이 되었다. 조선 중기까지 부녀자의 머리모양이었던 가체가 사치로 인한 폐해가 많아지자 영조와 정조 양대에 걸쳐 이것을 시정하기 위하여 화관이나 족두리를 쓰게함으로써 사용이 일반화되었다. 화관은 족두리보다 높이가 높으며, 두꺼운 종이에 무늬를 새기고 검정칠을 한 뒤, 가장자리를 도채부금(塗彩傅金)하고, 위를 금은보화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화관의 양옆에는 비녀를 꽂게 되어있는데, 일반적으로 나비가 장식된 죽잠을 사용하였다. 또 오색구슬로 찬란하게 꽃모양을 둘렀으며 나비가 나는 형상으로 하늘거리게 달아매었다. 이 화관은 앞쪽에 연두색으로 봉황 두 마리를 수놓았고, 위쪽에는 오색으로 구름 문양을 수놓았다. 화관 전체에 금속으로 만든 봉황을 달아서 움직이면 흔들리게 되어있다. 화관의 앞과 옆에 구슬을 꿰어 만든 줄을 늘였다. 처음 12 1 2 다음 페이지 끝